글쓰기는 나에게 대화 창구이다. 고해성사를 하듯 하나의 형식,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주로 내가 마주한 문제나 현실의 얘기가 소재이다. 그러니까 먹고, 잠자는 일에서부터 만나고, 헤어지고, 마주치는 일상에 관한 얘기가 대부분인 셈이다.
나는 혹독함이나 처절함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창구로 달려간다. 혹독함이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당하지는 않겠다는 결의로. 처절하게 무너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나는 원천적으로 관대함을 희망한다. 다시 말해 일상이 묻는 질문에 대해 관대함으로 마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측면에서 관대함을 되찾아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독함이나 처절함이 꼭 그만큼의 무게로 나를 짓누를 때, 꼭 그만큼의 무게로 관대함을 갈구한다. 그러니까 이런저런 번듯함을 내려놓고 속마음을 고백하면,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쓴다기보다는 멋없는 사람이라 꼭 그만큼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의 반증이기도 하다.
대화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름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나의 이름이. 나의 이름을 되찾기 전까지 관계는 불분명했다. 어느 하나가 그 하나를 독립적으로 설명하지 못했고, 부수적인 설명이 뒤따라야 했다. 확실치 않은 인과관계를 사실인 것처럼 검열관이 통제하는 것도 무방비로 당해야 했다. 날카롭고 단호한 방법이 필요해 보였다. 그때부터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많은 부분이 어색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면서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것으로부터도 강제적으로 쫓겨나지도, 분리되지 않으면서 자발성을 향해 발을 내딛고 있었다.
자발성을 위해 내가 선택한 과정적 행위는 하나였다. 나는 과감하게 혼자 있기를 선택했다. 오롯이 나의 들숨과 날숨에 의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읽기는 들숨이었고, 쓰기는 날숨이었다. 들숨과 날숨은 생명에 호흡을 불어넣었고, 많은 것들에게 관대함을 허락했다. 물론, 그 과정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from. 기록 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