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와 몽상 저편, 백야를 만나다

by 윤슬작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은 도스토옙스키 읽기 2탄, 《백야 외》

표도르에게서 꼭 하나를 가져오라고 말한다면, 나는 '몽상'을 가져오고 싶다. 희망을 가장한 상상이든, 현실을 외면한 무대이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였다. 그여야만 하고, 그였기에 가능한 작품들에서 나는 '몽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몽상의 끝은 언제나 '나'에게로 향했다.

'열린 책들'에서 출간한 《백야 외》는 도스토옙스키 단편이 8개 수록되어 있다.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약한 마음, 뽈준꼬프, 정직한 도둑, 크리스마스트리와 결혼식, 백야, 꼬마 영웅.

오히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쉬웠다. 3권 1,600p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대심문관 편에서 심문을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도, 그래도 읽어내려가는 일은 한결 쉬웠다. 고전이 지닌 본래의 특징이 그러려니, 장편이라서 당연히 이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는 근원을 설명하기 어려운 합리화로 분량에 대한 부담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창조한 세계에 완벽하게 몰입하여 온몸을 푹 담가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런 과정 이후의 작품이라 솔직히 《백야 외》는 편안하게 즐기면서 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단편이라는 생각에 조금 더 편하게 마음먹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초반부터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고백인지, 독백인지, 대화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뒤섞이며 몽상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등장인물의 몽상이 흥미로움을 넘어 지루함으로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독특하고 유니크하다는 생각을 넘어 길을 잃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길 가운데서 방향을 잃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한 명 한 명의 캐릭터가 지닌 특성을 파악하는 일에는 유리했지만, 그로 인해 다음 페이지가 궁금하다는 생각보다 얼른 지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힘들었다. 인내심이 필요한 책이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나는 '약한 마음'앞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약한 마음'을 읽은 후, 나는 몇 자를 끄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강력함이 나를 덮쳤다. 눈물이 난다. 울고 싶어진다. 음울해지고, 차분해진다'

약한 마음은 아르까지 이바노비치 네페제비치와 바샤 슘꼬프, 두 친구의 이야기이다. 아니, 신체적인 결함은 물론 마음이 허약해진 아르까지와 그와의 우정을 유지하며 곁에서 끝까지 아르까지가 겪는 심리적, 상황적 변화를 관찰하는 바샤의 얘기이다. 고마움 때문에 미쳐갈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준, 안타까운 아르까지. 스스로를 불행한 쪽으로 몰고 가는 아르까지를 바라보며 삶의 회의를 느끼는 바샤. 두 사람은 나를 덮쳤고, 몽상은 현실을 덮쳤다. 두 인물의 이야기에 나는 끝내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들을 위한 애도인지, 나를 위한 애도인지 모르는 눈물이었다.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은 아내는 믿지 못하는 의처증 남편의 질투가 소재였고, '뽈준꼬프'는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한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정직한 도둑'은 '장발장'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결혼식에서 '계산은 맞았군'이라는 마지막 글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열여섯 소녀가 나이 많은 남편을 만나는, 50만 루블의 지참금 이야기에서 과거 러시아의 씁쓸한 단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백야'. '백야'의 부제는 '감상적 소설, 어느 몽상가의 회상 중에서'이다. 나스젠까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나스젠까를 용서한다. 아니 용서를 넘어 그 이상이다.

' 아, 천만에, 천만에! 너의 하늘이 청명하기를.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 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오, 하느님!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p.310

마지막 작품 '꼬마 영웅'은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영웅으로 기억되는 최초의 장면에 대한 몽상이라고나 할까.

도스토옙스키는 개성적인 인물이다. 그의 작품 속에 있는 인물도 그러하다. 단편마다 개성 강한 캐릭터가 살아있고, 다분히 입체적이면서 이중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부담스럽다기보다 불편하다는 것이다. 속내를 들킨 것 같은, 굳이 펼쳐보고 싶지 않은 지하실 창고를 열어젖힌 느낌이다. 쓸쓸하고 슬픈, 삶의 부조리에 대한 허무주의가 짙은 가운데에서도 끝끝내 꿈꾸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을 보며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을 떠올렸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심리학자로도 손색이 없을, 니체가 얘기한 능동적 허무주의를 누구보다 잘 표현한, '위대한 작가'라는 표현조차 부족해 보이는, 실로 대단한 인물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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