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팠을 때도 그랬다. 학교에서 배가 아파서 설사를 했다고 말할 때도 그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걱정을 들을 때도 그랬다. 그런 얘기가 들려올 때마다 속상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좋지 않은 일에 대해. 하지만 조금 더 세밀하게 관찰하던 어느 날 나는 뜻밖의 감정을 발견했다. 바로 "죄책감"이었다.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아프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했어야 했는데라는 완벽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숨겨져 있었다. 마치 완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어떤 일이 생기면 '내가 이렇게 해서'라는 생각을 습관적으로 했던 것 같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살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일종의 도피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처럼. 하지만 이것도 책임질 가족이 없을 때의 일이었다. 아이가 낳은 후 그리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방법을 조금 바꾸었다. 의식적으로 나를 칭찬해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정확한 근거를 마련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순간부터 과장된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잘 한 것에 대해서도 아주 잘한 것이라고 과하게 칭찬해 주었다. 사랑을 주되, 과한 칭찬을 조심하라고 했던가. 단단한 뿌리가 없던 마음은 수시로 바닥을 드러냈고 거기에 꽁꽁 숨어있는 열등감까지 보태지면서 끝을 알 수 없는 우울감을 선사했다. 억지 칭찬도 방법이 되지는 못했다.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였다. 왜 이런 감정이 찾아드는 것일까.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는 어떤 사람인 걸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감정이 찾아드는 것이며, 이 감정의 근원은 무엇일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정말 탈무드의 구절처럼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도망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과하게 칭찬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간절하게 매달렸다. 나의 생각은 어디에서 왔으며,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언제가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해요?"
"매사 그렇게 살면 너무 힘들지 않나요?"
틀린 말이 아니다. 모든 일을 이렇게 진지하게 살면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이 가려져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 싫었던 나는 외부의 조언을 닫고, 내가 선택한 방법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내게 준 선물을 의외로 상당했다. 무엇보다 열등감. 저지대에 고여 있으면서 언제는 넘어뜨릴 수 있다며 자신하고 있는 열등감을 나는 발견했고 인정했다. 열등감이 문제인지, 자극제인지는 두 번째 단계였다. 나에게서 발견되는 심리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열등감이 내게 발견해낸 첫 번째 감정이라면 두 번째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여러 요인이 있을 수도 있다. 맏이라는 자리로 태어났고, 맏이에게 거는 기대가 큰 우리나라에서 나는 멋진 맏이가 되지 못했다는 것도 제법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 감정이 격하게 올라온 날에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날이 많았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사회화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우울감을 선사하기도 하고 두려움을 낳기도 했다. 지금이라고 완벽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이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세 번째로 알아낸 것은 나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유달리 안정감에 집착했다. 죄책감이나 열등감으로 인한 집착인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생긴 사람이 나였다. 하지만 그랬던 내가 요즘은 안정감이라는 단어를 해결책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본래 삶은 안정적일 수 없는데, 어떻게 안정적이고 싶었을까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기루 같은 것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안정감보다는 불안정성을 받아들이는 게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이 현실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죄책감을 덜어내는 데에도 한몫을 톡톡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충고를 건네기보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입장을 취해보고 있다. 아마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언제가 내게 질문했던 이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들려줄까 한다.
"생각이 너무 많이 힘들지 않냐고요? 힘들기도 해요. 때로는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으면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요. 희한한 게 그렇게 떠오른 생각들이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다른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죠. 어떻게 하면 된다는 소리 대신에 네가 원하는 게 뭐니라고 묻는 것 같아요. 희한하죠? 일단 그래서 계속 한번 해보려고요. 그 질문이 싫지 않거든요"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