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보낸 다양한 에피소드를 듣게 되었다. 추석날 아침 오전에 방문해 어른들께 인사만 지내고 왔다는 분, 추석에는 개인적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까닭에 집에서 머물렀다는 분, 8인 이하 적용으로 인해 각자 다른 시간에 다녀왔다는 분, 평소와 다름없는 의식을 치르고 왔다는 분, 내년 추석부터는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서 만나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는 분까지. 제사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어른들의 걱정을 차지하고라도 견고해 보이던 세상에 틈이 생겨났고, 일련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명절, 제사라는 것이 본질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곤 했다. 돌아가시는 분과의 추억을 떠올리거나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습보다 의식과 절차로 가득하다고나 할까. 젊은 친구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전통을 불편해하는 것을 불편하게만 바라볼 일은 아닌 것 같다. 시대는 그들에게 자기 주도적인 학습과, 바람직한 삶이 아닌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불합리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라고 얘기한 것도 우리였다. 시댁에서 제사 음식을 준비할 때였다. 아주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어머님은 고등학생인 딸을 불렀다. 엄마와 숙모가 하는 것을 곁에서 도와 배워두라는 의미였다. 그 순간이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이건 아닌데'. 아이가 오는 것을 막으면서 자연스럽게 넘겼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뭔가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거나 질서를 흔들고 싶은 용기도 없다. 다만 내게 주어진 몫을 감당하고 있지만, 그 몫이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컸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어른들은 세상이 변했다고, 소중한 가치가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본래의 것이 그대로, 흔들림 없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의 우려이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공존과 상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좋고, 너도 좋은 형식과 절차에 대해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 머리를 맛대어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은 즐거운 것이 되고, 만남은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일시 멈춤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실험이라면 실험이고, 양보라면 양보이며, 이해라면 이해라고 할 수 있는 행위가 필요해 보인다.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는 젊은 분이지만, 기존의 방식을 고수해야 한다는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젊은 친구들의 말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는 분도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합의가 이뤄지고, 어떤 부분에서는 정면충돌도 불가피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에 대해, 문제에 대해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 자정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교정을 통해 지켜갈 것과 회복해야 할 것, 버려도 되는 것을 구분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 길지 않은 경험의 결과이지만,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완벽하게 끌어안기는 결코 쉬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광대한 우주, 지구라는 행성, 어느 작은 마을에서의 일시적인 삶을 경험하고 있다. 무리를 이룬다고 하지만, 개인적인 조합에 불과하며, 독특한 개인이라고 하지만 사회적 관계없이 존재하기 어렵다. 서로 보이지 않은 연결 고리를 매달고 있는 셈이다. 각자의 이름을 가졌지만, 그 이름 또한 일시적이며 유한하다. 유한함의 한계를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모두 동등하며, 동등함 위에서 자신만의 날개를 펼치는 위대함을 지니고 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이전의 경험으로 살아가든, 현재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 소중한 삶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지점은 이곳이다. 저마다의 인생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제대로 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