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하나 있다. 침묵하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고민하게 만드는 버릇이라고 해야 할까. 무엇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정답을 제시할 능력은 없지만, 공개적인 공간에 비공개적인 경계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처음에는 이런 것을 능력이라고 평가하지도 않았고, 옳은 일이라는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라는 생각을 더 자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의견 또는 조언을 구해올 때면 어떤 형태로든 대답이 필요했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을 지울 수 없었다. 의구심에 느낌표 몇 개가 붙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용감해졌고, 진지함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유머를 놓치지 말자는 마음으로 나만의 스타일을 유지해오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요즘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있어 차이가 분명하다. 특히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빠르게 인정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남자 주인공을 이야기하면서 2PM의 이준호를 언급하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다가도 광고에서 보았던 "혹시 정조 역할하는 사람을 말하세요?"라고 되묻는 식이다. 모르지만 적어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문제는 아는 것 또한 시간이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기초적인 것에 불과했고, 조금만 깊게 들어가면 헷갈리는 것투성이다. 평생 배워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을 검증하는 작업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인데, 보통 책을 읽을 때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 본래 영상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유이겠지만, 활자 중독도 아니면서 아는 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것을 익히는 도구로 나는 '읽기'를 선택했다.
사실 읽기는 세심한 작업이다. 단순히 읽기 능력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읽기를 통해 흐름 또는 맥락을 이해해야 하고, 유의미한 정보를 추출해 내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제대로 된 이해와 분석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고, 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거나 자신의 삶과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찾는 것이 궁극적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앎'의 즐거움도 있겠지만 '앎'을 넘어 '삶'을 향하고자 하는 것이 읽는 인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삶을 향한 고정형 사고방식이 아닌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의 유도 장치로 '읽기'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상황적으로 여러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배움의 도구로 '읽기'를 선택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쯤에서 읽기를 통해 얻은 것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읽는 인간이라는 길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배웠다. 하지만 내가 배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어떤 마음을 조절해야 할지, 정작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생각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함께 배웠다. 드러난 문장 혹은 드러나지 않은 문장을 통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세상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경험했다. 앞문을 열고 지킬이 들어오는 동안 뒷문으로 슬며시 꼬리를 감추는 하이드를 지켜봐야 했다. 가볍지 않은 옷차림이었고 가끔 가만히 멈춰 한참을 두리번거리는 것도 목격해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읽기가 진행되는 동안 지속되었고, 읽기를 멈추는 순간 함께 멈추었다.
오늘도 나는 읽는 인간으로 시작한다. 짧게는 10분, 길게는 1시간 정도의 '앎'의 시간을 마주한다. 아직도 읽을거리가 넘쳐나고 있고, 수시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표현이 아니라 익어간다라는 동사를 끄적일 수 있게 만든 공로를 '읽기'에게 넘겨줘야 할 것 같다.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가능했고, 당연한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까. 물론 가끔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한 것이 많지만 아주 미세한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삶'을 목격할 수 있었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