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하나가 있다. 여기저기 원고지가 흩어져있고, 마룻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서는 휘갈겨 쓰기도 하고, 뭔가에 심취한 사람처럼 끄적이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 우스운 모습이다. 마루에 원고지를 펼쳐놓고 한쪽에는 원고지 뭉치가 몇 개, 그 옆에는 무지 노트가 몇 권 쌓여있다. 누런 대봉투가 주소만 적혀진 채 놓여있다. 누군가의 방해가 전혀 없는 풍경인데, 왜 그날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혼자 거실을 독차지하고 누워서 호사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풍경이다. 의지가 드러난 것이 있다면 얼굴 표정뿐이었다. 진지함이나 비장함을 넘어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숙함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다.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기억이 침묵하는 통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몇 살이었는지, 언제였는지 더 이상의 추적은 어려워 보인다. 다만 누런 봉투, 원고지 뭉치, 노트로부터 유추해낼 수 있는 뭔가가 있기는 하다. 그토록 오래 매달린,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을 가지게 했던,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신춘문예 또는 공모전. 이십 대 중반, 아니 후반까지도 특정 기간이 되면 향수병에 걸린 사람처럼 퇴근길에 원고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누런 대봉투 몇 장과 함께. 잠시 들린 문구점에서 원고지와 대봉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 한두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반복하는 모습에 혼자 중얼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곰도 아니고, 이렇게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야...'
하지만 순간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계산을 끝내고 원고지와 누런 봉투를 가방에 밀어 넣고 있었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뜨뜻미지근하게 제법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크기와 상관없이 보상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몇 개의 계절이 모습을 바꾸었고, 마음이 몇 번 들쑥날쑥했지만, '이제 그만할래'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먼저 경계를 긋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 같다. 참 오랫동안 반복했던 그 일이 서른을 맞이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대단한 상을 받았다거나 높은 자리에서 내 이름이 불린 것은 아니다.'가능성이 있어 보여요'라는 심사평과 함께 더 이상 공모전에 원고를 보내지 말고 작품 활동에 매달리면 좋겠다는 연락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포기하기 딱 좋은 시기를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내게 경계가 나타난 것이다. 하나의 끝에서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지점, 크기와 상관없이, 내게는 국경이 필요했고, 결국 국경을 만났다. 벌써 18년 전의 일이다.
from.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