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사람은 죽잖아. 나중에 크면 엄마 얘기 듣고 싶을 때 못 들으면 어떻게 하지?"
고등학교 3학년만이 아니라 2학년에게도 입시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감정을 순식간에 가장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기도 하고, 공포에 가까운 걱정과 불안이 생겨나면 휘청거리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첫째가 예전보다 조금 더 공부를 해야겠다며 잠을 줄이고 공부량을 늘여나가고 있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어느 때보다 몸이 혹사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키가 줄어든 것도 아닐 텐데 유난히 축 처진 어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생활이 단순해지면 마음도 단순해져야겠지만, 몸도 마음이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인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고, 충분하다고 얘기를 해주지만, 지나온 시간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이 계속 발목을 잡고 놓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무엇이 너를 도와주는 것일까?'라는 생각으로 몇 마디 말을 건넬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진심이 왜곡되지는 않을까, 오히려 자신감이 줄어들지는 않을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영혼 없는 조언처럼 들릴까 봐 몇 번을 생각하고 몇 개를 골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속상함, 슬픔이 잔뜩 묻어있던, 얼굴 전체에 절망적인 표정이 가득했는데, 조금씩 얼굴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특유의 미소가 되살아나면서 온기를 되찾은 마음이 조금씩 말을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뭐라도 하나 부숴야 해소가 될 것 같았던 말투에도 따듯함이 흐르기 시작했다. 문제가 해결된 것도, 공부량이 줄어든 것도, 성과에 대한 확신이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날카롭고 예민한 전투사의 모습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각이라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긴긴밤>의 노든과 치쿠, 노든과 앙카부, 노든과 어린 펭귄의 대화처럼 길고 길게 이어졌다. 슬픔에 대한, 고통에 대한, 기쁨에 대한, 시험에 대한, 결과에 대한, 미래에 대한, 희망에 대한, 노력에 대한, 믿음에 대한,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나온 질문이었다. "어차피 사람은 죽잖아. 나중에 크면 엄마 얘기 듣고 싶을 때 못 들으면 어떻게 하지?".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나고, 두 번째 기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떤 대답이 좋을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농담처럼 주고받았던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는 80살까지는 살고 싶다고 했지? 엄마가 100살까지는 살게"
"좋아. 좋아"라는 말이 꿈나라에서 들려온 것 같다. 거의 동시에 숨소리도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해'라는 말을 귀에 속삭여주며 침대로 돌아왔다. 긴긴밤의 후유증일 것이다. 금방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혼자 생각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오늘처럼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또다시 질서의 시간이 찾아오겠지, 그러다가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툭, 혼돈의 시간이 찾아오겠지, 그게 삶이 우리를 찾아오는 방식이니까. 삶이 아이에게도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 같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