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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보이/ 나는 강물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을까?

by 윤슬작가

이별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어떤 그림이 완성될까?

거기에 슬프지 않고 따듯한 느낌을 가미해야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가미해야 할까?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것 같은데, 그 질문에 제법 어울리는 책을 만났다.


팀 보울러의 「리버 보이」


리버 보이는 세 사람이 주인공이다. 세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게 되지만 어엿하게 '리버 보이'를 하나의 객체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리버 보이」는 약간은 괴팍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그렇지만 손녀 제스에게는 누구보다 친절한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어쩌면 제스가 태어나는 순간, 할아버지는 다시 태어났는 건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에게 '인생은 흐르는 강물처럼 아름다워'를 선물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제스를 할아버지처럼 수영을 좋아하고, 또 수영을 잘한다. 그런 두 사람에게 이별의 위기가 닥친다. 몸이 아픈 할아버지가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제스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과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아니, 불안해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신이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그렇게 두려움으로 잔뜩 움츠린 제스 앞에 '리버 보이'가 나타난다. 리버 보이는 강을 닮은 모습이었고, 수영하기를 즐겼으며,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리버 보이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지는 동안에도, 할아버지의 건강은 생각처럼 호의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마지막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림 한 장에 매달렸다. 좀처럼 그림에 제목을 붙이지 않는 할아버지가 그 그림에 제목을 붙였다. 리버 보이. 제스, 할아버지, 그리고 제스가 강에서 만난 리버 보이. 세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니,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아니 읽는 즐거움을 위해 이쯤에서 슬그머니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다.


판타지를 꿈꾸면서도 막상 판타지를 마주하면 멈칫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리버 보이」가 죽음이라는 것을 고통과 연결 짓지 않으면서 추억, 사랑으로 귀결시키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영혼이 깃든 그림 한 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도 제법 울림을 주었다. 책 후반부에서 리버 보이는 제스에게 제안을 한다. 강의 시작점에서 바다까지 함께 수영을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스는 할아버지의 그림을 완성한 이후,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그림이 완성된 날, 아니 할아버지가 병원으로 실려간 날, 자신을 두고 바다로 떠난 리버 보이를 그리워하며 강물 속에 뛰어든다. 그랬다. 이미 제스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을, 이별의 순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제스에게 리버 보이가 있는, 강물보다 더 편안한 곳은 없었다. 마음껏 그리워해도 되는, 마음껏 울어도 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리버 보이,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지만, 연령과 상관없을 것 같다. 그리운 사람이 생각났을 때, 마음껏 그리워하고 싶은 누군가가 떠올랐을 때, 차분히 페이지를 넘겨보면 좋을 것 같다. 유난을 떨지 않으면서도 곁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기분을 갖게 될 것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조금 미스터리한 스토리를 좋아하는, 그러면서도 감성적인 요소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해 주고 싶다. 단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복합적인 감정을 과장되지 않은 범위에서 다양하게 경험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나에게 「리버 보이」는 무엇일까? 아니면, 누구일까?


from. 기록 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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