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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질문,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질문

by 윤슬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기다림'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간다. 감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맥락을 느낄 수도 없는, 짧은 단막극을 마음대로 닫고 열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단 하나,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 고도가 보낸 소년의 전갈을 통해 '오늘은 올 수 없어요. 내일 올 거예요'라는 대사만 반복할 뿐 그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도 끝내 밝히지 않는다. 결국 베케트는 독자에게 공을 던지는 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내일은 고도가 오겠지?"


우회적이면서 날카로운 표현이었다는 생각이다. 고도가 누구인지 끝내 가르쳐주지 않음으로 인해, 모두의 고도를 허용했다. 작품 해설에 소개된 것처럼 어떤 사람은 신, 어떤 사람은 빵, 어떤 사람은 자유가 고도일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책장을 다시 넘기면서 내게 물어봤던 것 같다.


"나에게 고도는 무엇일까?"

"내가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신으로부터 건네받은 확답 같은 것도 없으면서 용기 내어 걸음을 옮기려는 마음은 어디에서 올까?"


때와 장소에 따라 대답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나는 거창한 것을 추구하기보다 소중한 것을 쫓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대단한 이론보다 개똥철학이라도 나의 의견을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소하지만 하나씩 뭔가를 이루거나, 발견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편이다. 즉 기존의 것을 따르기보다 내 안의 어떤 것을 재구성하고, 재배열 과정을 거치면서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기를 즐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끝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고, '고도'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다. 이런 방식을 수년째 고수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지루해하거나,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고 할 것 같은 상황인데도 그렇지 않다는 게 가끔은 스스로도 신기하다.


예전의 나는, 이러한 기다림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빨리 결과가 드러나기를 희망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나의 행동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가 중요했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평가받는지에 더 많은 시간을 매달렸다. 차라리 그럴 때는 '고도'라는 것도 쉽고, 단순했다. 눈에 보였고, 정확한 이름도 있었다. 반면 상황을 따지자면 오히려 지금이 더 열악하다. 눈에 보이지 않고, 정확한 이름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두 주인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떤 것을 기다리며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가고 있다. 이런 모습이 나조차도 어떨 때는 신기하다를 넘어 놀라울 때가 있다.


"나에게 고도는 무엇일까?"

"내가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신으로부터 건네받은 확답 같은 것도 없으면서 용기 내어 걸음을 옮기려는 마음은 어디에서 올까?"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다그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더 너그럽게 바라볼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어제도 했었고, 한 달 전에도 했었던 것이다. 일 년, 훨씬 더 그 이전에도 계속되었으며, 그 질문을 화두로 삼아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잘 알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하면 방향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이어왔다는 반증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from. 기록 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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