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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을 위한 예찬

by 윤슬작가

몇 년 전에 <4차 혁명, 강력한 인간의 시대>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저자는 4차 혁명이 가속화되면, 중간에 해당하는 평균의 개념이 사라지고 양극화 현상이 심해질 거라고 얘기했다. 기계문명은 부유층과 빈곤층이 더욱 극명하게 나눌 것이고, 간격은 지금보다 훨씬 더 넓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기계문명을 두려워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가 모두 가져간다는 생각보다는 기계가 해낼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은 재고의 가치가 있으며, 기계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방향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기계문명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기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화에 적응된 선택을 하게 될 확률에 관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약간 두렵다는 느낌과 함께 평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겨났는데, 무엇보다 지금까지도 이 책을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목이 있는 '강력한 인간'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강력한 인간, 여러 의미로 해석이 될 것 같은데 내게는 대단한 인간, 놀라운 인간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본질에 충실한 인간', '내면의 힘을 가진 인간'이라는 말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적응을 해내는 능력이 필요하겠지만 이전에 자신감을 잃지 않은 채 단단한 내면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려왔다. 왜냐하면 어차피 미래를 예측하고,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상상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하며, 어디까지나 확률적인 상황일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다짐했던 말은 '4차 혁명을 준비하자'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를 믿는 마음으로, 나를 이끌어간다는 마음으로, 나의 삶을 조금씩 쌓아 나가자'였다.


하지만 솔직히 '나를 믿는다'라는 것은 굉장히 추상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정립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그래야만 일상을 살아가고 인생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이어온 '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다시 생겨났고, 그날도 나의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일 읽는 사람, 매일 쓰는 사람이 되자'였다. 오랜 시간 동안 해오고 있는 것들인데다가, 무엇보다 나와 내 삶에 실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나를 믿는 것이 무엇이다'라고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는 어렵지만, 누군가 '나를 믿는 것'에 관한 질문을 해오면 늘 비슷한 얘기를 해주는 것 같다. '하루 10분 독서, 그리고 하루 한 번 글쓰기'를 해보라고. 짧든, 길든 매일 읽고 쓰다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런 행위를 반복하는 동안 나를 믿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다고.


나는 질문이 생겨나는 순간을 좋아한다. "왜?" 혹은 "어떻게?", "무엇을"이라는 질문이 생겨나 무언가를 요구하는, 불편하다면 불편한 순간을 즐긴다. 정재승 박사의 <열두 발자국>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창의적인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창의적인 순간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질문의 시간'과 '창의적인 순간'을 동의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질문이 생겨나는 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 어렵게 느껴지기는 해도 설레는 일이 되고 있다. 어쩌면 질문의 답이 매 순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강력한 인간의 시대>도 그랬고, <열두 발자국>에서도 그랬고 기본을 강조한다는 느낌을 강했다. 오늘도 나는 질문을 던져본다. 창의적인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 아니다. 그보다는 어제 했던 것을 오늘도 잘 해내기 위해서가 더 시원한 대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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