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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윤슬작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사람에게 전원시를 선물할 수 없다.

오로지 동물만이 할 수 있는데, 동물만이 천국에서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은 전원적이다.

갈등이나 가슴이 메이는 장면, 진화 같은 것이 없는 사랑이다.

카레닌은 토마시와 테레자 주위로 반복에 근거한 삶의 원을 그었고

두 사람도 그에게 같은 일을 해주길 기대했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우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젠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을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92




체코, 프라하를 배경으로 네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토마시, 테레자, 그리고 프란츠, 사비나.

가벼운 섹스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외과 의사라는 무거움을 벗어던진 토마시. 이혼남인 그는 어디까지나 섹스가 목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토마시 앞에 나타난 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테레자. 그녀는 엄마의 가벼움을 극도로 혐오하며, 자신에게서 엄마의 가벼움이 발견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한다. 각자가 지닌 존재의 무게감에서 벗어나는,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던 두 사람에게 우연의 반복이 찾아온다. 우연의 반복은 필연으로 이어졌고, '그래야만 한다'에 이끌려 서로를 향해 자신의 삶을 포개어 얹는다.


사비나와 프란츠. 사비나는 극중 가장 자유로운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구속, 속박, 책임에서 자유롭기를 원했고, 관습적인 방식과 태도를 거부한다. 그런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대학교수 프란츠. 유뷰남인 그가 자신의 아내에게 사비나와의 관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 또한 자유로운, 당당한 삶을 추구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바로 그날, 사비나는 프란치를 떠나는 배신을 선택한다. 사비나, 사실 그녀는 토마시의 친구였다. 아니 섹스파트너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무게감으로 삶이 무너지기를 원치 않았고, 무거움에 대한 공통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프란츠를 떠난 사비나는 혼자 자유로운 생활을 선택하고, 프란츠는 사비나에 대한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사비나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에 관한 편지를 받게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선입견같은 것이 있었다. 제목에서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고, 굉장히 추상적일 질문을 마주하고는 의견이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도통 떠오를 것 같지 않았다. 보통 읽고 나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나오는데, 이번 작품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니체의 작품을 통해 만났던 영원회귀 사상을 이곳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미 겪었던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중이며, 그로 인해 삶의 허무함을 얘기하는 니체. 하지만 니체는 수동적 허무주의를 희망하지 않았다. 그는 가느다란 밧줄 위에서 조심스럽게 초인의 삶을 제안했었는데, 토마시, 테레자, 프란치, 사비나 중에서 초인의 모습을 닮은 사람은 없었다. 갈등하고 고민하고 방황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그려졌다.

토마시는 가볍다?

테레자는 무겁다?

사비나는 가볍다?

프란츠는 무겁다?

책의 초반부를 읽으면서의 느낌은 저러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첫인상 같은 거라고나 할까.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대척점에 두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 내면적 욕구와 표면적 모습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 차이, 격차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토마시는 테레자의 고통에 대해 공감했고, 테레자는 기술자와의 연애행각을 벌였으며, 사비나는 천성적으로 과묵한 사람이었으며, 프란츠는 비현실적인 삶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사랑은 확실해보이는데, 어느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벗어던지고 싶었던 자신의 무게감에 위에 또 다른 존재의 무게감이 더해지면서 평생동안 '그래야만 한다'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단 한번뿐인 삶, 어쩌면 무의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삶, 가볍게 살아도 될 것 같은 삶인데 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사랑에 대한 담론이라고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랑과 섹스는 동의어일까?, 토마시를 보면서 가졌던 의문이다. 기이함을 쫓아, 세상을 정복하려는 사람처럼 여자들과 섹스를 즐기는 토마시,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마음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다. 또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자문해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토마시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를 걱정하기보다 그런 상황에서 흔

들리는 자신을 나무라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그는 내면의 욕구에 충실한, 그러니까 누구보다 무거운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던 테레자에 대한 토마시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만나는 순간, 이전의 토마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여전히 섹스를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누구도 테레자의 자리에 침범할 수 없었다. 테레자 또한 자신을 위해 외과의사를 포기하고 유리창 닦는 노동자가 된 토마시를 바라보며 자신의 모순적인 행동과 내면의 욕구에 대해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토마시가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에게 올 거라는 것을, 토마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자신의 행동에 부당함이 많았음을 그제야 깨닫게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밀란 쿤데라는 우리의 삶은 한번 뿐이며, 한번은 없는 것과 똑같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 의견을 거부할 생각이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사고로 죽는 순간, 덧없음과 무의미함이 순간적으로 스쳐갔지만, 사비나의 환영을 쫓아간 곳에서 안경 낀 여자에 대한 마음을 확인했지만 결국 아내 옆에서 죽는 프란츠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한번은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원히 원형을 그리며 반복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비록 지금의 모습이 일회성이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말해주고 싶다. 하루 앞을 모르고, 내일을 알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둘러싸여 연민이나 동정으로 살기보다는 가설을 세우고 상상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삶을 선택하고 싶다. 탈무드의 글귀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말이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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