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과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을 하나 뽑으라고 하면 단연 생각과 행동 사이의 간격이라고 얘기할 것 같다.
나는 즉흥적인 편이었다. 감성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이들 말처럼 감각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이지 않아 보이는 까닭일 것이다. 반발할 수 없는 이유가 나조차도 그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에는 나는 동네에 소문난 울보였다고 한다. 이웃에 계시는 분이 "저렇게 많이 울어서 나중에 절대 울산에서 시집을 갈 수 없을 거야"라는 농담을 던졌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분의 예언이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결혼식을 끝으로 울산을 떠나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여간 울음만 큰 게 아니라, 마음이 동하면 자신에도 없는 말을 불쑥 내뱉었다. 직장 상사에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않겠느냐"라고 겁 없이 덤볐다가 수습한다고 애먹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동료와 함께 윗사람에게 불만을 토로하다가 윗사람이 어렵게 털어놓은 얘기에 마음이 뺏겨 처음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경험도 있다. 그러니까 생각이라는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매번 마음이 머리를 이겨먹었다. 그랬던 나였다. 아니, 내게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요즘은 흔한 말로 철이 든 것인지, 겁이 많아졌는지, 조금 포장해서 성숙한 것인지 변화가 생겨났다. 심사숙고까지는 아니지만 불쑥 몸을 일으키거나 감정에 이끌려 지켜낼 자신도 없는 말을 툭툭 던지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조금 진지해졌고, 약간 진득해졌다. 앞장서서 걸어야 할 때가 되면 거부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편이지만, 그런 상황이 주어지면 나름대로 절차적인 패러다임을 갖추었다. 우선 나와의 합의가 끝났느냐가 첫 번째 절차인데,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생각이 중요해진 것이다. 물론 예전처럼 마음이 이겨먹는 날이 상당하지만, 그 마음조차도 섣부르게 행동하기보다는 합의를 이뤄내는 과정을 거쳐 진행하게 된 셈이다. 손과 발을 움직이는 일도 그렇다. 예전이라면 벌써 무엇을 내밀어도 내밀었겠지만, 지금은 합의가 이뤄졌는지 묻고 또 묻는다. 그게 나다. 아니, 내게 그런 모습이 내게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지 않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이중적이다. 두 개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두 개의 목소리를 낸다. 어린 시절에는 일방적으로 이뤄졌던 것들이 지금은 조금 더 근원적인 질문을 통해 걸러내기를 거치는 양상이다. 둘 중에 어느 쪽이 맞다, 혹은 틀리다를 고집하지 않고 적절하게 경계를 오가는 모습도 더러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좋다. 삶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노력하면서 동시에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끌어넣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원시적으로 보일 수 있는 담백하다는 말, 심플하다는 말이 좋다. 소박해 보일지라도 그것을 중심으로 적당히 경계를 넘나드는 요즘이 좋다.
나와 합의가 된 것에 대해서라면 마음껏 건너가고, 나와 합의가 되지 않은 것이라면 '1'도 넘어가지 않으려는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이태원 클라쓰 드라마에서 그런 대사를 본 적이 있다. "단 한 번, 그 단 한 번으로 모두 바뀌는 거라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1'이라고 해도 눈 감아지는 '1'이 있는가 하면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는 '1'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맞이한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