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 엄마가 150살까지 살게

by 윤슬작가

밤늦은 시각,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된 둘째와 함께 책을 읽고 있다. 2학년까지는 토요일에 내가 진행하는 독서수업을 참여했는데, 3학년이 되면서 학원 스케줄이 맞지 않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시작했는데, 제법 오래 읽어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남자아이치고는 책 읽는 것에 대해 큰 부담감을 느끼지는 않는 모습니다. 다만 게임을 조금 많이 좋아하고, 책을 붙잡는 것보다 게임을 먼저 붙잡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사실 이것도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게임만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학교와 학원을 잘 다녀주고 있고, 무엇보다 지금은 학원에 숙제를 꼬박꼬박 해가고 있으며, 학원에 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지 않고 있으니, 이 정도면 대단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둘째는 꼼꼼한 협상가이다. 토요일 수업을 빼주는 대신에 밤에 20분씩 책을 읽자고 했더니, 머릿속을 잠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하루에 20분,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평일 100분이 나온다. 그렇게 20분씩만 읽으면 미리 책을 읽고 엄마가 진행하는 책 수업에 1시간 30분 동안 참여하지 않아도 되니 손해 볼 장사가 아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고, 나 역시 만족스러운 조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3학년이 되어서도 책 읽기를 이어가고 싶었는데, 학원 스케줄로 인해 방법을 찾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제법 만족스러운 테이블이 완성되었고,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함께 책 읽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며칠 전부터 둘째가 붙잡은 책은 김동식 소설가의 <회색 인간>이다. 나는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정세랑 소설가의 <시선으로부터>을 읽고 있다. 솔직히 시작이 어려워서 그렇지, 읽기 시작하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른다. 특히 김동식 소설가의 작품은 존재, 감정, 생각을 마치 제각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어 해체되고 결합시키는데 탁월한 솜씨를 자랑한다. 순식간에 개체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주체가 되고, 어느 지점에서는 낯선 객체로 만들어버린다. 상식을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는데, 상식을 하나씩 망치로 두들기는 맛이 있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끝까지 인간성,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정적인 관전 포인트이다. 둘째가 재미있게 읽을 거라는 생각으로 추천했는데, 예상은 적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둘째는 온전히 그 세계에 빠져있었다. 20분쯤 흘렀을 때였을까, 절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몇 편을 읽은 후여서 둘째에게 물어보았다.


"아들은 어떤 작품이 기억에 남아? 김동식 작가님 작품 재밌지?"

"응. 재밌었어. 음, 그중에서 디지털 고려장... 지금은 그게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


"엄마?"

"응?"

"엄마 이 책 읽었어? 디지털 고려장 읽었어?"

"읽기는 했는데, 아주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해..."

"여기에서 가상 현실로 노인을 보내는 게 나오거든. 이곳에서는 부양비도 많이 들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보내는 거든..."

"응."

자못 진지한 얼굴이었다.

"엄마, 엄마는 어떻게 할 것 같아? 가상 현실에 갈 것 같아?"

"음... 그러니까 지금 엄마가 몸도 불편하고, 제대로 활동할 수도 없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라면 말이지..."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한 것인지,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안심을 시켜줘야 하는 건지, 진실을 얘기해야 할지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여간 뭐라고 정확하게 딱 짚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가상현실에 자발적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뉘앙스를 풍겼던 것 같다. 그렇게 20분은 족히 흐른 것 같았다. 언젠간 내가 갈 수도 있다는 길에 대해, 언젠가 이런 상황이 현실적인 주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이럴 때 보면 아이가 아니라 한 사람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는 애잔한 마음과 함께.


"엄마, 죽지 마! 엄마 오래 살아야 돼!"

여섯 살 때인가, 일곱 살 때인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둘째가 내게 했던 말이 있다. 꿈을 꾼 이후였는지, 아니면 죽음에 대한 자각이 아이를 찾아간 것인 잘 모르겠다. 아마 죽음에 대한 인식이 생겨난 시점인 것 같다. 어디에서든, 누군가를 통해서든 죽음의 그림자를 발견했던 모양이다. 딱히 간절한 게 없이 살다가 간절한 게 생각나는 첫 번째 커브길을 지나는 중이었다. 그때마다 대성통곡하는 둘째를 끌어안고 얘기해 주었다.


"걱정 마! 엄마가 150살까지 살게"

"걱정 마! 엄마가 아들보다 1살 더 살게"


눈물을 글썽이면서 대성통곡을 했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 이렇게 마주 않아 디지털 고려장을 얘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의 시간, 나의 시간,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책을 읽는다는 것, 어쩌면 책과 친분을 쌓아가는 게 아니라 인생과 친분을 쌓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from. 기록 디자이너 윤슬

매거진의 이전글요새 우리 때문에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