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빨간펜 선생님

by 윤슬작가

내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고,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는 과정을 좋아한다. 그 마음이 덜컥 출판사를 하면 참 좋겠다고 마음을 부추겼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나의 글을 다듬고, 나의 인생을 매만지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누군가의 글을 다듬도 그의 인생을 매만지는 일은 더욱 근사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방향이 좋고, 의미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 어떻게 이어가다 보면 길이 열리겠지라는 무대뽀 정신이 한몫한 것도 있다. 누가 보면 참 무모해 보인다고 말할 일을 용기 있는 선택이라며 응원하면서 출판사에 발을 넣었다.


출판사 업무 중에서 내가 맡은 일은 기획과 원고를 다듬는 과정이다. 기획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작업이다. 의식하지는 못한 채, 몸과 마음을 기대어 살아온 것에 대해 이름을 불러주고,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힘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좋겠어요, 이런 방향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며 너무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반복적으로 저자와 의견을 좁혀나간다. 저자의 일상에 평화가 지속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원고를 다듬는 과정도 비슷한다. 몸으로 실천하고 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밖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것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상관관계를 살펴보는 작업은 쉽지 않다. 시간을 아껴 열심히 덤벼들어도 몇 페이지, 몇 줄을 넘기지 못할 때가 많다. 거기에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보냈는데, 편집자에게서 '이 부분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요'라는 피드백을 돌려받을 때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는데, 그런데 정말 방법이 없다.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도 있다. 보통 그런 피드백을 보낼 때는, 정말 이해가 안 되어서라기보다 조금만 더 구체적이었으면, 조금만 더 정확한 단어로 표현하면 훨씬 이해도 쉽고,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더 공감할 수 있고, 한 사람이라도 더 좋아요를 누를 수 있게 만들고 싶은 바람이라면 바람이고 욕심이라면 욕심이 원인일 것이다. 그 마음이 자꾸 빨간펜 선생님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


3월 초, 내 책에 대한 퇴고를 마친 이후부터 외부 원고에 대한 기획서를 다듬고 초고 지원과 퇴고를 다듬는 일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고 있다. 거의 일주일에 한 작품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같다. 연기자처럼, 일주일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그래서 마음이 느슨해질 틈이 없다. 아주 가끔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또 다른 한쪽에서는 누군가의 인생을 다듬는 일이잖아, 또 다른 낯선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 일이잖아라며 뭔가가 마음을 자꾸만 간질거린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가 올라간다. 그래서인지 힘에 부친다는 생각보다 내 삶을 좋은 일에 쓰고 있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하는 것 같다.


외근이 없었던 어제도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빨간펜 선생님으로 생활했다.

빨간펜 선생님, 내가 해내야 할 일을 잘 해내고 있다는 증거 같기도 한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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