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by 윤슬작가

지난주, 그 지난주에 연달아 비슷한 질문을 모임에서 받았다.

한 곳에서는 "나는 ___을 기다린다"에서 빈칸에 무엇을 채울지 물어왔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였다.

‘그래, 그랬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나온 시간 동안 나는 꿈이라는 단어에 누구보다 집착하던 사람이었다. 아주 상세한 그림을 그린 날도 있고, 뿌연 안개 속에 걷는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이 드는 날도 있었다. 하나의 장면, 그러니까 ‘꿈을 이룬 장면’을 상상하기를 즐겼다. 물론 꿈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바탕색은 동일했다. 꿈이 있기에 불행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고, 꿈이 있기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마음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지난주 질문의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오랜만에 ‘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꿈이라는 단어가 생경하게 느껴져서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붙들고 매달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입 밖으로 내민 적도 머릿속으로 떠올린 적도 없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삶의 변화를 알아차린 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___을 기다린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한참 고민하면서, ‘어쩌면?’ , ‘아마 그것을 ...’이라고 말꼬리를 이어 나가면서 머릿속을 굴려보았지만,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다. 책이 대박 나서 출판사가 대박 나기를 기다리는 걸까, 다음 책을 빨리 완성하고 싶은 걸까, 멋진 여행지에서 커피 한잔을 기대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서 이것이 끝났으면 좋겠어’ 혹은 ‘ 하루라도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딱히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도 않고, 되감기를 하면서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고 재촉하는 마음도 생겨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그날 나는 아주 시시한, 참 재미없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다리지 않아요”

“에? 기다리는 게 없다고요? 무기력은 아니실 것 같고, 어떤 의미예요?”


어떨 때 보면 스스로 말을 참 멋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날은 멋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의미를 다루는, 본질에 관해 궁금해하는 사람의 이야기에는 리듬감이 부족해 지루해지기 쉬운데, 딱 그날도 그랬다. 하지만 진짜 방법이 없었다. 그게 ‘나’라는 사람인 것을.

“참 재미없는 대답이죠? 그래요. 저도 예전에는 꿈에 매달렸고, 막연하지만 어떤 것을 이룬 장면을 상상하면 어서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니까 그날을 위해 ‘오늘을 희생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 부분이 바뀐 것 같아요.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오늘을 산다’라고. 그날이 오면 좋겠지만, 그날을 위해 살아버리면 오늘이 너무 속상하고 아쉬울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다르게 먹었어요. ‘오늘을 산다’라고 말이에요. 그러면 그날이 오면 감사하고, 그날이 오지 않아도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뭘 기다린다는 개념보다는 방향성을 떠올리고, 그것에 쓰임이 될 수 있도록 ‘오늘’에 집중하겠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아요. 그 의미에서 기다리지 않는다고 얘기한 것 같아요”

따분하고 시시해 보일 수 있지만 저 대답은 진심이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언젠가 더 멋진 문장을 마주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마음이 시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내 마음을 소중하게 다루고 싶고, 나의 밤이 무해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억지로 끼워 넣은 기분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끌어안고 있다는 느낌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자꾸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물고 싶습니다”

“나는 어제를 지나 오늘에 왔습니다. 내일은 내일이 되면 알겠지요”

“오늘이 그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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