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0일, 기말고사를 끝마쳤다. 마지막 시험지를 제출하던 순간, 의외로 가장 먼저 밀려온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이제 방학이구나’,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 사이로, 미처 채우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미련과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학기는 유독 혼란스러웠다. 서울국제도서전과 일정이 겹쳐, 출간을 마무리하고 굿즈를 준비하며 출판사 대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느라 정신이 쏠린 탓에 정작 시험 준비는 뒷전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벼락치기라도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확실히 알았다. 벼락은 하늘에서나 치는 것이지, 내 시험지 위로 정답이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는 문제는 간신히 적었지만, 모르는 건 끝까지 모르겠고, 헷갈리는 건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다음에는 절대 벼락치기 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중얼거리며 학교를 나서는 발걸음에는 묘하게 홀가분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며칠 뒤, 남편과 조촐한 종강 파티를 열었다. 막걸리 한 병, 맥주 한 병, 그리고 몇 가지 간단한 안주를 놓고 나눈 대화 속에, 그간의 고단함과 성취가 조금씩 녹아들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진짜 시작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 대학원 가겠다고 몇 년을 고민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어느새 한 학기가 지나버렸어.”
“맞아. 결정하는 게 제일 어렵지. 시작하면 어떻게든 되더라.”
말끝마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게 되었다. 맞는 말이다. 시작은 언제나 낯설고 두렵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에서부터 ‘이 시기가 맞는 걸까?’, ‘중간에 포기하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불안까지, 수많은 질문이 밤마다 불쑥 찾아왔다. 어떤 명확한 해답을 가진 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 미루면 후회할 것 같다는 예감,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등을 떠밀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정 이후,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매주 빠지지 않고 강의실을 향했고, 리포트도 빠짐없이 제출했다. 출석률 100%.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작지만 값진 약속이었다. 결과로 증명할 만한 대단한 성취는 아니었지만, 나의 선택을 스스로 지지하고 응원하며 성실히 임했다는 점만큼은 높이 평가해주고 싶다.
어느 철학책에서 읽은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다.” 시작은 단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향해 스스로 응답하는 일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시작은 어렵다. 익숙한 것과의 작별이자, 보이지 않는 내일을 향한 결단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것은 가장 의미 있는 행위이기도 하다.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여는 열쇠, 삶의 결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어줄 수 있으니 말이다.
아직 나는 1학기밖에 마치지 않았다.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지금 이 시작이, 다음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아직 만나지 못한 기회와 가능성은 그 ‘시작’ 위에 서 있다. 나는 그 길 위에 있다.
시작은 어렵지만, 시작했기에 가능해진다.
하기는 어렵지만, 했기에 그래서 더욱 귀한 일이다.
오늘도 그 시작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아갈 생각이다.
from 윤슬작가
#윤슬에세이 #오늘을건너는법 #작지만단단하게 #느리지만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