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은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아일랜드 출신 소설가입니다. 그녀의 신작 『너무 늦은 시간』은 세 개의 단편이 소개됩니다. 그녀는 이번 작품들을 통해 남자와 여자, 그 관계 속에 숨겨진 혐오·불균형을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만났던 작품들이 ‘따뜻함’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차가움’이었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조금 과장된 상황을 연출하여 우리로 하여금 틈, 허점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합니다.
처음으로 소개되는 이야기는 〈너무 늦은 시간〉으로, 카헐과 사빈의 만남에서부터 연애와 결혼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연인의 갈등처럼 다가옵니다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카헐의 행동에서, 사빈의 감정에서 연애와 결혼에 숨겨진 관계의 불균형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저녁을 태우고, 사랑이 식은 여자는 덜 익은 요리를 내놓는다는 말이 있지 않았나?”라는 저자의 표현이 참으로 예리합니다. 사랑의 온도와 관계를 식탁, 그것도 음식의 온도로 짚어냈으니 말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한 작가와 낯선 남성 방문객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을 표현했습니다. ‘하인리히 뵐의 집’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이 무대입니다. 그곳에서 주인공인 작가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케이크를 구워 손님(남자 교수)를 대접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을 위해 찾아든 공간에서, 불청객의 방문임에도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그녀의 심리와 행동을 지켜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내면에 숨겨진 마음, 그 마음이 가져오는 불균형한 관계와 상황, 아이러니함에 대해서 말입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남극>은 개인적으로 결말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마무리를 된다고? 딱 그 마음이었습니다. 평범한 중산층,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여자 주인공이 작은 일탈을 꿈꾸며 길을 나섭ㄴ다. 그리고 낯선 남자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다음, 가족에게 돌아갈 준비를 하는 그녀 앞에 남자가 다시 나타납니다. 거절한 명분이 없었던 그녀는 다시 남자를 따라가게 되는데요. 결말이 완전히 예상을 빗나간 상황으로 전개됩니다.
“보살핌이요, 이 세상에 보살핌이 필요 없는 여자는 없죠.”
그녀의 온몸을 녹인, 남자의 ‘극진한 보살핌’이라는 표현이 아이러니하게도 불안과 두려움, 공포의 상징적인 도구가 되는 결말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 게 사실입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극진한 보호였을까? 아니면 극진한 통제였을까? 나아가 ‘보살핌’이 선한 의도로만 쓰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사랑, 보호, 보살핌 이런 표현이 때로는 권력과 지배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번에도 클레어 키건은 『너무 늦은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무대를 펼쳐놓고, 관객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되돌아보고,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기를 희망합니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들, 남자와 여자, 그 내면의 속마음과 진실이 궁금한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천천히 읽고 싶고, 오래 곱씹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from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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