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용서받아본 사람

by 윤슬작가

스트레스가 가장 높은 시기를 꼽는다면 아마 고3을 따라올 시기는 없을 것이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묘한 긴장감이 집 안 공기처럼 조용히 내려앉는다. 누구도 대놓고 큰소리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는 단 한 문장으로 완벽한 선을 그어 놓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말은 우리에게 부탁이라기보다 경고에 가까웠다. 정중하지만 분명한 경계선이었다. 더 묻지 말라는 신호이면서, 동시에 믿고 기다려 달라는 간절한 요청처럼 느껴졌다.


고3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나름대로 애를 썼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몇 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예상보다 단단했다. 상처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뒤섞인 묘한 기분이 남았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달라고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기에는 마음이 쉽게 놓이지 않았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아차렸던 걸까. 어느 날 거실로 낮은 톤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들어왔다.


“필요하면 내가 말할게. 그냥 믿고 기다려줘.”


그날 이후 남편과 나는 조금 더 조심하기로 했다. 고3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마음을 앞세우지 않겠다고,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 보겠다고 서로 다짐했다. 믿고 기다리는 일. 말로는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떤 날에는 ‘믿음’보다 ‘인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기도 했다.


주말 오후였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 방 문 아래로 침대 끝이 보였다. 아이의 두 다리가 길게 뻗어 있었다.


‘아직도 자고 있나?’


일요일이니 조금 더 쉬게 두자는 마음으로 깨우지 않고 나갔는데, 오후까지 잠을 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게까지 자는 것 같아 문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아이는 침대에 누운 채 패드를 들고 문제를 풀고 있었다.

‘아이쿠…’


순간적으로 민망한 마음이 머리를 스쳤다. 괜히 의심하는 마음으로 문을 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거실로 나오자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내가 보기엔 누워서 놀다가 우리가 들어가니까 갑자기 문제 푸는 거 아닐까?”


피식, 잠깐 웃음이 났다. 그러자 남편이 덧붙였다.

“아무래도… 내가 자기보다 믿음이 약한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남편을 바라보며 웃었다.


“음… 아마 그건 내가 용서를 많이 받아봐서 그럴 거야.”


남편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보았던 김창옥 강사의 이야기를 꺼냈다.


김창옥 강사는 말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하지 않았던 사람,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던 사람은 ‘용서를 많이 받아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쉽게 믿기지 않는 장면을 만나도 비교적 용서를 먼저 떠올릴 수 있다고 했다. 반대로 부모님의 속을 거의 썩이지 않았던 사람은 그런 상황이 낯설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인정해야만 했다.


‘아, 나는 용서를 많이 받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물론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저 나이 때의 나를 생각하면… 우리 아이가 훨씬 나은 것 같아.”


예전에 어른들이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딱 너 같은 아이 낳아봐.”

어릴 때는 그 말이 조금 억울하게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지 않는 일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억울할 것도, 서운할 것도 금세 사라진다.


돌이켜보면 나는 실수도 많았고,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순간도 많았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꾸중을 하면서도 결국 나를 받아주었다. 다시 기회를 주었고, 한 번 더 믿어주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바라볼 때 쉽게 판단하기보다 한 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한다.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면 진심을 주고받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한다.

‘용서를 많이 받아본 사람’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약간의 과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만큼은 분명하다. 세상을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싶다는 작은 희망의 끈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래서 오늘도 그 마음으로 나를, 그리고 아이를 바라본다. 어쩌면 지금의 시간은 오래전 부모님이 내게 건네주었던 그 용서를, 조금이라도 세상에 되돌려 주고 있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_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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