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려움, 나의 불안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명확하게 용어를 정의하고 싶다. 나는 두려움과 불안을 분리해 인식하고,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불안이다.
내게 두려움은 공포인데, 이 감각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다. 호랑이굴 앞에서 호랑이를 떠올리며 느껴지는 것은 공포이자 두려움이다. 반면에 불안은 대상이 특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쉽게 소거되지 않고, 키에르케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두려움은 이겨낼 수 있다. 오히려 생각보다 간단하고 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불안을 넘어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늘 가장 위험한 곳까지 나를 몰고 간다.
나는 불안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항상 불안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어서 그 상태가 불안인지 모르는 사람. 내게 세상은 애초부터 그냥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늘 혼자였고 고독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았고 쌓이는 비밀만큼 외로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지는 않았지만 누구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더 깊은 폭력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나는 무력감, 배신감, 절망 등의 감정을 느끼며 서서히 포기해 나갔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성정이 그런 건지,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그런 건지 희망을 버리지는 못했다. 내 편이 있을 거라는,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여 줄지 모른다는 희망.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집착했다. 성별, 나이, 직업과는 별개로 나는 관계 위에 생을 얹고 싶었다. 그것이 모래 위에 쌓아 올려진 성인 줄 알면서도. 그만큼 혼자 버텼던 그 긴 시간이 너무나 무섭고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다시 고립될지도 모른다,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지 모른다, 고독하고 외롭게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고독은 마치 물이 가득 찬 깜깜한 방 안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았다. 방의 문은 밖으로 나 있고 혼자서는 나갈 수가 없는데 물속에서 숨을 참으며 허우적 대는 나는 소리를 칠 수 없고, 친다고 해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 ‘아, 나는 여기 있는데. 아직 여기 있는데.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벌을 받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독과 고립의 시간을 감당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내가 살아있기를 바랐던 적이 없다. 불행히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는 아마 미래로 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내 불안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나마 버텼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게 되었고 알지 못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이 불안은 나의 정체성인가. 불안이 없으면 나는 내가 아닌 걸까. 여전히 비틀비틀 답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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