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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Jan 19. 2022

무능함

내가 원치 않는 정체성과 경험 그리고 그때 몸의 감각

능력주의 사회가 공정한 사회라고 착각하는 세상이다.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결괏값을 기준으로 평가하면 공정할 거라는 착각. 그것을 착각이라고 옅게 이해하면서도 ‘무능함(inability)’으로 평가되는 스스로의 모든 결과를 혐오한다.


불안장애(혹은 질병)로 약을 먹는다. 그동안 복용량을 늘렸다가, 약을 바꿨다가 다시 종류를 추가하는 과정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부작용을 다 겪었다. 이 부작용이 결과에 대한 진실인지, 변명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물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쨋든 내가 무능했다는 게 중요하므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잤고 그러면서도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몇 번이고 깼다. 근육이 자꾸 빠져서 체력이 안 좋아졌고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가끔 이상한 게 보이기도 했다. 시간관념이 흐려져 매번 약속에 늦었고, 더불어 기억력도 자꾸 안 좋아졌다.


인턴을 하는 동안 나는 일을 해야 할 시간을 제대로 버텨내지 못했고, 또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을 다 해내지 못한 채로 회의에 들어갔다. 출근시간과 발표시간에는 매번 지각을 하고, 과제를 하지 않은(혹은 못한)채로 컨펌을 받았다. 타인이 내 능력을 가늠하는 시선을 느끼면서 스스로의 무능함에 잠식당했다.

그럴 때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내 서사가 딱 여기에서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애초에 없었던 걸로 하고 이 순간에 죽어버리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할 거면 아무것도 아닌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무능한 나를 해하는 일은 상당히 자주, 그리고 쉽게 일어났다.


무능함에 대한 감각은 불안으로 이어지고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에 곧장 신체화로 발현된다. 손이 떨리고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발끝부터 사지가 마비되듯이 저리면서 어지러워진다. 손이 떨리고 숨이 잘 안 쉬어지기를 몇 십분 방치한 후에야 떨리는 손을 인지하고, 또 비상약을 떠올리기까지 몇 분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더듬더듬 약을 꺼내 먹는다. 때에 따라 두통약도 두어 개 같이 삼킨 후 표정을 가다듬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도 몇 시간을 공황의 바다에서 질식한 듯이 가만히, 그렇게 가만히 있는다.

#수치심워크샵 #1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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