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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들렌 Aug 13. 2019

i에게

[김소연 시집] i에게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중략]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 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은

하루에 축복을 보내니. 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

경의를 보내니. 모르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 있니. 아직도, 아직도 무서웠던 것을

무서워하니.


  너는 어떠니. 도무지 시적인 데가 없다고 좌절을 하며 아직

도 스타벅스에서 시를 쓰니. 너무 좋은 것은 너무 좋으니까 안

된다며 여전히 피하고 지내니. 딸기를 먹으며 그 많은 딸기 씨가

씹힐 때마다 고슴도치 새끼를 삼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여전

히 괴로워하니. 식물이 만드는 기척도 시끄럽다며 여전히 복도

에서 화분을 기르고 있니. 쉬운 고백들을 참으려고 여전히 꿈속

에서조차 이를 갈고 있니. 너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

다고 말했다.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

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던 게 마음

에 들었다.


[중략]




접착제가 필요없을 만큼 가까이 지내던 연인이 사라졌을 때,

없던 것도 나누려고 애쓰던 우리가 남이 됐을 때,

나도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게 느껴지곤 했다.

맛있는 음식과 안전한 공간이 죄책감을 자극한다고 해야 하나.


이 시에서 맘에 드는 문장은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다.

화자가 사랑한 이는 겁이 많고 무서운 게 많아서 자기 곁을 식물에게조차 내주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사랑했던 이의 방어기제를 ‘서먹하다’고 표현하는 건 정말 사려깊다.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여기다.

너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들었다.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 이를 옆에 두는 건 삶에서 얼마나 안전한 부분인가. 

나도 내 지인에게 어디로든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존재이고 싶다. 



최근에 읽은 김애란의 <잊기 좋은 이름>에 나온 구절과 왠지 모르게 느낌이 닮았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어디로든 가지 않아도 되는 게 나에게 아름다움이고 반짝임이라서 그런가보다.


 


[시 읽는 시간]은?

매일 좋아하는 시를 조금씩 공유해보는 코너에요.

저에게 시를 읽는다는 건 어떤 시간을 견디는 거에요. 

버티는 힘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문장을 먹으면서 시간을 쥐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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