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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들렌 Apr 29. 2019

모성신화의 붕괴, <리틀포레스트>

딸에게 ‘엄마’는 특별한 만큼, 작가는 엄마를 특별하게 그렸다.

 


 '딸을 버린 엄마'라는 소재를 이토록 가볍게 풀어냈던 적이 있었나. 딸을 버린 엄마는 언제나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거나 한없이 철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는 신파적 코드를 자아낼 만큼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아이를 버리고 가는 팜므파탈도 아니다. 그냥 그는 평범한 사람이다. 엄마를 평범하게 그려내서 이 내러티브는 특별해졌다. 모성신화에 갇히지 않은 엄마가 툭툭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치코의 '엄마'는 입체적이다. 그는 ‘모성’을 발휘해 이치코에서 헌신하지 않는다. 이치코가 자립을 할 수 있을 때쯤, 돌봄을 멈추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집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불쑥불쑥 편지로 이치코에게 안부를 묻는다. 통념적으로 어린아이를 두고 떠나는 엄마는 ‘나쁜 엄마’지만, 작가는 엄마를 ‘아이를 버린 사람’으로 그리지 않는다. 아이를 버린 엄마를 그렸다면 내러티브 전체가 엄마의 부재로 인한 결핍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며 이치코를 위로해줬던 시절'에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엄마가 이치코에게 남겨준 추억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내용을 골자로 흘러간다. 


  대게 모성은 특별한 '희생'이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없이 숭고한 엄마가 자식과 남편의 모든 일을 품어주고 이해해준다. 하지만 <리틀 포레스트>의 엄마는 크리스마스에 남자친구를 데려와 함게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치코는 그냥 즐겁게 사는 엄마를 본다. 이치코킄 그런 엄마의 삶의 태도를 '보고' 배운다. 엄마가 만든 기억은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던져놔도 자라나는 토마토를 보면서,  우울할 때 크림 브렐레를 만들어 먹으면서,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면서 이치코는 상처를 흉터로 만든다.  


  내 삶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공간은 크지만, 자주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 만화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만화의 컷에 고개를 들이밀지 않는다. 34편의 스토리 중에 단 6편에만 엄마의 얼굴이 등장한다. 엄마는 성격을 드러내거나 핵심적인 이야기를 할 때만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야. 집중해 다치기 쉬우니까’같은. 엄마는 이치코의 삶에 직접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서 깨달은 감각대로 이치코는 자신의 삶을 엄마처럼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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