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슬픔, 감동, 평화
몇 년 전,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따뜻하고 평온한 바닷가의 노을을 바라보며 한 여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을을 보면 눈물이 나더라. 젊었을 때도 그랬는데,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눈물이 나는 게 왜인지 모르겠어."
이 사진은 그 여배우가 본 바닷가의 일몰 사진과는 다른 장면이지만,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을 준다.
바닷가의 일몰은 누가 봐도, 언제 봐도 경이롭다. 그 놀라운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며 정말 그렇게 보편적인 감정이 모두에게 적용될까? 의문이 든다. 아마도, 보편적인 감정을 모두에게 적용하는 오류를 범한 것 같다.
사실,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사람에게는 보편적인 감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
이 사진은 내가 논문과 일로 가장 힘든 시기에 찍은 사진이다. 아파트 부엌 베란다 문을 열고 고개를 90도 틀어 왼쪽을 바라보면, 흐린 날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멋진 일몰을 볼 수 있다. 날씨에 따라 다양한 노을을 만나기 때문에, 저녁 무렵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처럼 된 내게, 이 사진 속 노을은 특히 지루하고 답답함으로 죽어가던 나의 온몸의 세포를 자극하는 충분한 장면이었다.
하늘의 구름과 해가 지는 장면은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얼른 휴대폰 카메라를 열고 '찰칵, 찰칵, 찰칵~' 하는 순간을 잡아낸다. 여러 번 셔터를 누르며, 앵글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좁은 공간에서 몸을 비틀며 사진을 찍는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장면을 내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 차곡차곡 쌓는 것처럼, 그렇게 사진을 쌓아간다.
소중함은 내 마음이 어떤 것에 대해 간절하게 진심일수록 더 크게 느껴진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흔한 자연의 현상이지만, 내 마음에 위로가 되는 장면을 만나는 것은 우연일까? 애틋하고 감동적인 느낌을 받는 것은 그때의 내 마음이 카타르시스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노을은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온다. 그리움, 슬픔, 감동, 평안... 같은 사진이라도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이 올라온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이 사진을 보고 말했다.
"이 사진이 내가 본 너의 사진 중에 가장 좋아."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좋다'는 말을 '평가'로 받은 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좋다, 나쁘다는 말은 평가할 때 쓰는 말이니까.)
이 사진은 그 시점보다 오래전에 페북에 나의 느낌과 함께 소개했던 사진이었다. 한참 후에 그 친구가 이 사진에 대해 또 다른 느낌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친구가 내 사진에서 비슷한 것을 느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엉뚱하게도 평가받은 기분이 들어서 거리가 느껴지고 서운한 감정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친구가 내게 몹시 소중한 친구였기에 그런 감정이 더 크게 일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친구와 서로의 사진을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너무도 빨리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린 그 친구가 사라진 후, 나는 깊은 상심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벌써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 든다.
사진으로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으며 위로가 됐던 사람의 부재는 나의 세상을 온통 슬픔으로 물들게 했고, 노을이 짙은 날 하늘을 바라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마음속 가득 슬픔이 차오르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이 사진이 추억이고, 슬픔이고, 그리움인 이유다.
때때로 이 사진 속의 노을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내 안의 평화와 연결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진치료를 하다 보면 붉은색이 격한 감정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감정과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게 작용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안과 위로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움과 슬픔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노을과 같은 자연의 장면도 우리 각자의 내면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사진을 통해 그 감정들을 다시 되새기고, 때로는 그 속에서 치유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깊이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