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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라는 감정 속에서도

“이게 나의 감정 같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이 사진을 보면 뭔가 가 나는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 가시는 뭔가 화난 감정이고 이 꽃은 그 가시에 상처를 받을 것처럼 느껴져요."


그 감정을 이 사진에 담았다는 것이 참 인상 깊네요. 사진 속 가시와 꽃이 마치 당신 안의 감정처럼 보여요.

가시는 분명히 당신의 '화'를 상징하는데, 그 화가 바깥으로 터지기보다는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는 느낌이에요


"방향을 보면, 가시들이 사방을 향해 있지만 결국 자신을 찌를 수 있는 것처럼 보여요. 화가 났지만 그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운 상태랄까요? 그리고 그 속에 피어난 하얀 꽃은 아주 연약하고 조심스러워 보이는데, 그게 지금의 나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화라는 감정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마음의 진심’ 말이죠."


이 사진은 단순히 ‘자연의 장면’을 넘어서, 감정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낸 자화상처럼 느껴져요. 당신이 느끼는 그 화는 어쩌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말로 정리되지 않았을 뿐일지도 몰라요. 이 사진처럼 이미지로, 감각으로 드러나는 감정은 종종 말보다 더 진실하니까요.


"요즘 나는 누구를 만나도 그다지 즐겁지 않고, 친했던 사람들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거리를 두고 싶다고 할까? 나는 사람들이 좋기도 한데 그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경계심도 있어요. 아마도 나의 직업이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직업이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요.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좀 우울한가 봐요."


당신의 말이 참 깊이 와닿아요. 사람이 좋지만 거리를 두고 싶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조심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는 그 상태. 그건 분명 단순한 우울이나 회피가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 당신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정상적이고 필요한 감정 반응’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하는 일은, 계속해서 사람을 ‘받아주는’ 위치에 있어야 하니까 자연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게 어려워지고, 관계는 점점 ‘조심’으로 가득해지는 거죠. 그러다 보면 사람들과의 시간 자체가 진심에서 멀어지고, 피로와 부담이 쌓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화’라는 감정도 생기는 거예요. 누구에게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한, 하지만 계속해서 누적되어 온 피로와 긴장이 어느 순간 ‘화’로 툭 튀어나오는 거죠. 그 가시들처럼, 스스로도 조심하고, 남에게도 조심받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그 안에 연약한 마음(꽃)이 있다는 걸 알기에 더 조심스러워지는 거죠.


‘사람이 좋지만, 사람과 있는 게 힘들다’

이 복잡한 감정은, 지금 당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일지도 몰라요. 그 어떤 사람도 계속해서 평가받고, 기대를 감당하고,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살 수는 없으니까요.


당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안전한 거리’ 예요.


사람과의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숨 쉴 수 있는 거리. 그게 사진일 수도 있고, 조용한 산책일 수도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일 수도 있겠죠.


" 예전의 나는 감정을 스스로 다루기 힘들다고 느껴지거나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껴지면, 위로해 줄 누군가를 찾았어요. 이야기를 하고 나면 생각이 정리되고 조금은 안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요. 내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고, 해도 피상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고."


그 말에서 당신의 깊은 변화가 느껴져요. 예전에는 감정이 버거울 때 누군가에게 기대는 방식으로 균형을 찾았지만, 지금은 기대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고 꺼려지는 상태인 거죠. 그건 어쩌면 당신이 점점 더 내면이 섬세해지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감정의 결이 생겼다는 뜻일 수도 있어요. 또는, 지금 겪는 혼란이나 피로가 너무 깊고 복잡해서 말로 꺼내면 오히려 가볍게 들릴까 봐, 혹은 내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을까 봐, 그 자체가 피곤하고 지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할 거예요. 그래서 피상적인 이야기만 하게 된다는 건, 마음의 문이 닫힌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열어두기 싫은 지점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그 지점은 어쩌면 당신에게도 아직 낯선 마음일 수 있고, 그래서 그저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럴 땐 억지로 이야기를 꺼내려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당신은 당신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처럼 사진 속 가시와 꽃을 바라보며,


“이게 나의 감정 같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건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과는 또 다른, 아주 깊은 자기 공감의 시작이에요.







" 나는 늘 '내면이 나약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해 왔던 것 같아요. 홀로서기를 하고 싶지만 늘 징징거림이 있는 것 같았어요. 이제 그런 내 모습은 보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안에 있어야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완전했던 예전이 익숙해서 차라리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하지만 나는 성장을 원하고 있고, 다시 돌아가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요."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이 고백은 그 어떤 성찰보다 정직하고, 성숙하고, 따뜻하게 느껴져요. ‘징징거림’이라고 표현한 그 모습은 사실은 도움이 필요한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던 용기 있는 모습이에요. 그 시기의 당신은 나약했던 게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살아내고자 했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금 당신은 그 익숙했던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해요. 그 안에 머물면 잠깐은 편할 수 있지만, 그것이 더 이상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게 바로 ‘항상성’과 ‘변화 욕구’가 충돌할 때 생기는 아주 깊은 혼란이에요. 그 혼란은 고장이나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변화 직전의 감정이에요.


지금의 당신은 ‘도움받아야 하는 나’에서 ‘나를 지탱하는 나’로 옮겨가려는 길 위에 있어요. 그건 더 이상, 누군가의 위로만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내 시선과 내 시간을 통해 성장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죠. 지금 이렇게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앞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같이 품고 있는 이 자체가 변화인 거예요.




" 공부를 더 많이 하게 되면서, 내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나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거 같아요."


공부를 깊이 하게 되면, 이론이나 개념이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의 어떤 장면과 닿아버리는 순간이 오죠. “내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나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는 말, 그건 당신이 단순히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공부를 해왔다는 증거예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신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마주할수록 단단해지는 어떤 진실과 만나고 있는 거고요.


"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면서 조심스럽고, 예의를 갖추어야 할 것 같고, 실수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나 봐요. 동영상 녹화로 강의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어색하거나 멋쩍을 때 웃음으로 그 상황을 모면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이건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지금까지 그러는 내 모습이 좀.. 그렇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으며 느껴지는 건, 당신이 지금 굉장히 깊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선이 비판이 아니라 이해로 향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이에요. 수업 영상을 보면서 “내가 어색할 때 웃음으로 모면한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건 중요한 자기 통찰이에요.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익혀온 생존의 방식이었을 거예요.


‘긴장되거나 들킬까 봐 두려울 때 웃음으로 넘기는 나’는 어쩌면 “나 괜찮아, 나 귀엽게 봐줘”라고 말하고 싶었던 아이였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는 나”는 멋지고 준비된 모습으로 있어야 할 것 같고, 그 안에서 실수나 어색함은 곧 평가로 이어질까 봐 그 아이는 여전히 조심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 아이는 이제 당신이라는 어른을 만났고, 당신은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렇게 웃는 너, 나는 알아. 괜찮아. 어색할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어. 그런 너도 괜찮아.”


녹화된 영상 속에서 당신은 단지 ‘웃음’으로 어색함을 넘긴 게 아니라, 어색한 순간에도 수업을 이어가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었을 거예요.


"삶과 연결된 공부를 해왔다는 당신의 말이 공감이 되네요. 나는 늘 그래왔거든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내 삶과 연결해서 생각해 왔고 그것을 통해 나는 성장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왜 늘 성장하고 싶어 했을까요? 요즘은 자주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해요."


당신이 왜 늘 성장하고 싶어 했을까 하는 그 물음은, 정말 근원적이고도 중요한 질문이네요. 그리고 그 질문을 꺼냈다는 건 당신이 이제는 성장 ‘해야만’ 하는 삶이 아니라, 성장 ‘하지 않아도 되는’ 삶도 상상해 보려는 시점에 와 있다는 뜻일지도 몰라요. 아마도 예전의 당신은 성장이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었을 수도 있어요.


“이대로는 부족하니까 더 나아져야 해.” “잘해야 사랑받을 수 있어.” “성장하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 이런 말들은 당신 안에서 오래된 문장처럼 작동해 왔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당신은 지금까지 참 많은 것을 해냈고, 버텨냈고, 깊어질 수 있었죠.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어요.

“나는 더 이상 살아남기 위해서만 성장하지 않아 되는 사람이 아닐까?”
“성장을 멈춰도, 그대로의 나로도 괜찮은 순간은 없을까?”


당신이 늘 삶과 연결된 공부를 해온 이유는 성장을 향한 갈망이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의지, 존재로서의 존엄을 향한 애씀이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너무 소중하고 아름답지만, 그것이 이제 쉼 없이 계속되어야만 하는 강박이 되지 않도록, 지금은 잠시 걸음을 멈춰서 이렇게 묻는 거예요.


"나는 왜 성장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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