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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섬 Jun 06. 2019

회의

이책이글 32회_이글_회의_160524

나는 조용히 창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옷방인 것 같다. 사람들이 의외로 신경쓰지 않는 방. 들어와보면 거의 다 옷방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을지 대강 그려졌다. 모두들 자신을 특별하다고 믿겠지만, 이집 저집 다녀보면 사람들의 생각이나 생활은 거의 다 비슷했다.


집안을 충분히 살펴보며 안방으로 갔다. 중요한 물건들은 안방에 있다. 낡은 나무문에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손잡이를 잡고 문을 살짝 든 다음 천천히 손을 돌렸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화장대 두번째 서랍쯤에 돈이나 귀중품이 들어있을거다. 아니면 장롱안에 있는 이불 밑에.


마음은 급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가져갈 만한 물건들을 담고 있을때, 내가 들어왔던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지만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던 덕분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일어나서 벽 뒤에 숨어 옷방 문을 지켜봤다. 나처럼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사람이 뒤꿈치를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이 집 사람들은 아니구나. 그렇겠지. 창문으로 들어왔으니까. 어중간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 집을 나갈때까지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먼저 인기척을 내야 했다. 처음에는 놀라서 달아나게 만들까 했지만, 허둥대다가 소리라도 내면 나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차라리 조용히 말을 거는 편이 나았다.


"놀라지 마시오. 먼저 온 사람이 있소."


그가 멈춰섰다. 다행히 입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들어오긴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거 각자 조용히 챙겨서 나갑시다. 어떠시오?"


그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들고 온 가방에 물건을 담기 시작했다. 물건을 고르고 챙기는 솜씨가 능숙했다.


"형씨는 어쩌다가 이 일을 시작하셨소?"


그가 하던 일을 멈추고 섰다. 내가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나도 놀랐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소. 먹고 살길은 막막하고 할 줄 아는 건 없고, 다 그런거 아니겠소?"


그래 뭐, 다 그런거지.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있는 놈들이 다 해먹으니 우리같은 사람들은 이럴 수 밖에 없는거죠."


우리가 있는 집은 그 있는 놈들의 집이 아니라는 건 서로 알고 있었지만, 굳이 꺼낼 필요는 없는 얘기였다.


"그래도 난 이번 일만 끝내면 손씻고 착실하게 살거요."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 말이 뭐라고, 오기가 생겼다.


"나도 이번 일만 끝내면 그만 둘 생각이었소. 자식들 보기도 민망하고 뭐 좋은 일이라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누가 좋아서 이 짓 하는 사람있겠소. 이 집 양반들한테도 못할 짓이고, 나도 알고보면 뼈대있는 집 자손이오."

"나라고 안그렇겠소. 우리집도 조부때까지는 떵떵거리며 잘 살았소. 이놈의 세상이 요상하게 변하면서 우리집 같이 세상 물정 모르고 착실한 사람들 돈만 야금야금 빼갑디다. 내 사연도 책으로 내면 열 권은 될거요."

"어허, 나는 젊었을때만 해도 엘리트였소. 건실한 사업체도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라에 미운털이 박혀서 세무조사 받고 이리저리 휘둘리다 이렇게 된거지. 원래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내 말이. 나도 그렇소. 그럼 형씨 우리 이번 일만 끝내면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맙시다."

"까짓 것, 그럽시다. 이왕 말 나온 것 그냥 오늘부터 관두는 게 어떻겠소. 따지고 보면 이 집 양반들이 무슨 잘못이 있나. 보아하니 딱히 잘 사는 집도 아닌데. 우리랑 같은 처지 아니겠소."

"까짓 것 뭐, 그럽시다. 챙긴 거 다 원래 자리에 두고 깔끔하게 나갑시다."

"좋소."


나는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려고 손을 넣다가 순간 멈칫했다. 그도 나와 비슷한 자세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처음으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 들리는 어느 집 티비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우리는 그 자세 그대로 다시 가방을 닫았다. 그리고 옷방 창문을 열고 차례대로 밖으로 나와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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