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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섬 Jun 04. 2019

고마워요

이책이글 25회_이글_4년 전_160211

그때부터였어요. 제가 그 사람만 바라보게 된 건.

평소와 다름없이 바닥만 보면서 걷고 있었는데, 세련된 구두를 신은 그 사람과 길 한가운데서 마주치게 된 거죠. 비켜가려고 고개도 안 들고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그 사람도 같은 쪽으로 오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서 있었는데 저를 지나쳐가는 그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어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죠. 조금씩 멀어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마치 따라오라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따라갔죠.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따라간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냥 따라다니는 것뿐이고요.

그런 것도 문제가 되나요? 가까이 다가간 적도 없고, 그냥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만 보는 건데. 혹시 알아요? 그 사람이 위험해지는 상황이라도 생기면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쪽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가 좋아진 적 없어요? 자기도 모르게 빠져든 적 없냐고요. 이런 감정이야말로.. 이런 게 바로 사랑 아닌가요? 저는 바라는 게 없잖아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멀리서 지켜만 보는 거잖아요.

어느 정도는 숭고한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아요? 아니, 숭고한 거 맞는 거 같아요.

4년이잖아요. 그쪽은 4년 동안 누군가를 계속 지켜본 적 있어요? 지금도 난 그 사람 생각만 하면 설레고 두근거리고 그래요. 도대체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 거에요? 그 사람은 내 존재조차 모른다니까요.


아니요. 이상하게 보지 않아요. 나도 그동안 쭉 바라봤거든요. 당신이 한 번도 뒤를 돌아본 적이 없어서 알지 못했겠지만요.

저도 그때부터였어요.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고 있다가 우연히 봤어요. 당신이,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과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던걸요. 그리고 당신이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의 표정까지도요. 그 사람이 당신을 지나치고, 당신이 뒤를 돌고, 그때 당신을 봤어요. 그 사람은 작게 혼잣말을 하며 날 지나쳤고요. 무슨 말인지는 묻지 말아줘요. 난 말하지 않을 거니까. 그 사람이 날 지나치고 곧 당신이 나를 지나쳤어요. 좋은 향기가 났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을 따라다니고 있죠.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게 당신 뒤만 바라보고 다녔어요. 4년 동안이요.

이런 얘기, 갑작스러울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뭔가를 계획하고 말을 꺼낸 건 아니에요. 그냥 문득 알았어요. 당신은 그 사람을 절대로 부르지 않을 거라는 걸요. 이대로 두면 언제까지고 이대로 일 거라는 걸 그냥 문득, 알았어요.

그 사람은 당신을 모르죠. 하지만 난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 오래 봤으니까요. 어쩌면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지도 몰라요. 그래서 알았나 봐요.

당신은 하지 않을 거지만 나는 해보려고 해요. 용기라고는 안 할게요. 당신이 용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요.

말이 길었죠.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거에요. 당신은 누군가의 뒷모습만 바라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그 얘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 번쯤은 이렇게 마주앉아보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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