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회_이글_돼지들을 가득 실은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_190521
누구에게나 습관이 있지만, 대부분의 습관은 타인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호는 수를 세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기억나는 시절부터 이미 세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교실이 2층에 있었는데,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이 총 몇 개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기만 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선생님은 주변에 좀 더 관심을 가지라고, 집에 가는 길에 꼭 세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영호는 사실 알고 있었다. 1층에서 15계단을 오르면 작은 공간이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16계단을 더 올라오면 2층이었다. 그게 주변에 대한 관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단의 수는 알고 있었고, 친구들의 침묵을 깨고 대답할 정도의 숫기는 없었다. 그때의 아이가 그대로 자라서 지금의 영호가 되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출근길이었다. 숭실대를 지나 상도터널로 가는 길은 차로 가득했다. 일분에 일 미터씩 전진하는 와중에 영호 옆으로는 돼지들을 가득 실은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영호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돼지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총 열 마리였다. 돼지들을 실은 차 너머로 학산문화사 건물이 보였다. 영호가 가고 싶어 했던 몇 안 되는 회사였다. 만화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면 인생이 만화 같지 않을까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영호는 이미 충분히 자란 영호였다.
한참이 걸려 상도터널을 빠져나오고 나서 돼지들을 실은 차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다시 돼지를 세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총 아홉 마리였다. 응? 아홉 마리였나? 열 마리였던 것 같은데? 영호는 돼지들을 실은 차 옆으로 가서 경적을 울렸다.
“저기요~ 돼지 한 마리가 없는데요?”
돼지들을 실은 차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급하게 내려 돼지들을 살펴보았다. 정말 한 마리가 없어졌다고 했다. 남자와 영호는 같이 당황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전까지 그렇게 많던 차들이 둘의 뒤에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먼저 상도터널 쪽으로 뛰어갔다. 영호도 함께 뛰었다. 터널 안에서 돼지 한 마리가 한강대교 쪽으로 나가는 길을 막고 차선을 넘나들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뒤에 있는 차들은 돼지를 지나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운전자들은 혹시 돼지가 자기 쪽으로 달려들까 봐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돼지에게 다가가 능숙한 손길로 돼지를 이끌었다. 다행히 돼지를 포함한 누구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영호는 다시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고, 한강대교 중간까지 가서 유턴을 했다. 그리고 터널 안에 있던 돼지를 처음 발견한 순간을 떠올렸다. 터널 한가운데서 차에서 떨어졌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내린 그 돼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죽으러 가는 길에서 벗어날 다시없을 기회였지만,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었을 텐데. 남자가 자기를 잡으러 왔을 때는 어땠을까? 오히려 안심했을까? 죽으러 가는 길이지만, 그래도 아는 길이라서?
돼지 사건으로 회사에 늦었고, 이 과장이 영호를 따로 불러서 지각한 이유를 물었다. 영호는 짧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차가 좀 밀렸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태평했던, 돼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