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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륜 May 13. 2016

시작부터 다른 한 해,제주

일 년에 단 한 번 한라산 야간산행을 할 수 있는 날, 1월 1일 새벽

제야의 종이 치는 그 순간이 일 년의 시작을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월 1일 00시가 될 때에 혼자 있는다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다거나 하면 지극히 불안했다. 마치 다가오는 새해의 모든 기운이 안좋게 흘러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2015년 하반기, 오래 사귄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는 무언가 더 큰 결심과 변화가 필요했다.


그 남자를 만날 때의 내 인생이 오로지 '결혼'과 '좋은 여자가 되는 것' '좋은 엄마가 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면, 헤어진 이후에는 내가 갖게된 자유가 참으로 싱그러웠고, 모든 일에 의욕이 생겼고, 더 열심히 멋있게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 남자의 문제였다기보다는 그 남자에게 마냥 기대고싶었던 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하면 2016년을 정말 뜻깊게, 남다르게 맞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한라산 야간산행을 알게됐다. 일년에 단 한번, 1월 1일 00시부터 야간산행이 허락되는 한라산-


등산을 가끔 다니긴 했지만 서울 근교 이외에는 설악산밖에 가본 적이 없고, 그나마도 겨울 산행이 아니었던 내게 한라산 야간산행, 그것도 겨울산행은 꽤 두려웠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아마도 당시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 12월 31일 퇴근 후 비행기를 예매했고, 인터넷 검색을 해서 야간 한라산 산행 파티원을 모집하는 어떤 게스트하우스의 글을 보았다.


그때는 이 한라산 산행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칠런지를 전혀 몰랐다.


퇴근하고 바로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를 탔다. 체력을 비축해놔야 할텐데 풀근무를 하고 가서인지 갈때부터 기진맥진 했다. 공항에서 한시간 떨어진 게스트하우스는 또 왜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게스트하우스 옆에 딸린 카페에는 우리가 들고갈 김밥과 물, 그리고 비상식량(사탕, 초콜렛 등)이 꼼꼼하게 준비돼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언니의 세심한 배려다. 밤새 산행할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게 무얼까 고민하고 또 알아보고서는 이렇게 알차게 준비해주셨다. 게스트하우스도 북적북적한 다인실이 아니라 죄다 1-2인 실이다.


12시 제야의 종이 치기 전까지, 체력 보충을 위해 자고있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침대에는 전기장판이 깔려 따끈했다. 이때 자둔 쪽잠이 밤샘 산행의 원동력이 됐다.


12시경 일어나 다같이 카운트다운을 하고, 짐을 챙겨 한라산으로 갔다.

운전자하는 사람이 산까지 타면 더 피곤할까봐 기사님을 불렀다. 열명 남짓 사람들이 스타렉스 한대에 오밀조밀 앉아 한시간 가량을 달렸다.



그리고는 새벽 2시 부터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방은 어둡고 추웠다. 의지할 것은 앞사람들의 발길과 내 머리에 달린 헤드랜턴 뿐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덕분에 처음에 무리해서 속도를 안내고, 사람들 걸음걸이에 맞춰 찬찬히 걸어나갔다. 그렇게 다섯 시간을 걸었다. 중간중간 대피소에서 잠깐 몸을 녹이기도 하고, 목을 축이기도 했지만 길게 쉬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정말 마의 구간을 거쳐 (끝없는 계단과 계단과 계단) 백록담에 올랐다.


인내와 고난을 거쳐 정상에 오르자 이런 풍경이 나타났다.

내 발밑에 구름이 깔리고, 그 뒤로 해가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어가는 땀 때문에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기를 30분,

드디어 날이 밝고, 구름 위로 해가 뜨는 장관을 보았다.


한라산 정상에서 이런 일출을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날이 흐려 못볼 가능성이 많은 이 곳에서

고맙게도 나에게 이런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날이 좋았던 덕분에 백록담도 봤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고 하는 백록담(?!)인데 너무 쉽게 민낯을 드러냈다.



귀한 일출 장면과 백록담을 보고, 하산을 했다.

이상하게 하산이 더 힘들었다. 더 길게만 느껴지고 끝이 없었다.


갈 때엔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기때문에 오로지 한 발 한 발 떼는게 목표였다면, 밝아지니 이제는 옆도 앞도 너무 잘 보이고 끝없는 하산길에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래서 유독 하산이 더 오래 걸렸나보다.

갈수록 무겁게만 느껴지는 가방을 손에 들었다 어깨에 들었다 하다가 결국엔 손에 들고 내려왔다.



벌써 다섯 달도 더 지난 이 얘기를 굳이 쓰는 이유는,

이 경험이 내 2016년도를 완전히 바꿔놨기 때문이다.


한라산 야간산행 덕분에, 같이 올라갔던 사람들과 계속 (제주에서) 만나게되는 사이가 됐다. 사람과 친해져서 돌아오는건 계획에 없었는데, 지금은 사람들 빼고는 설명이 안되는, 그런 산행이 됐다.

그래서 벌써 올해에만 세 번 제주도를 다녀왔고, 그 사람들의 살아가는 얘기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안정된 직장, 안정적인 가정이 내 20대 중반의 우선순위였다면,

후반에 접어든 지금은 하고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것, 일과 삶의 밸런스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퇴근 후의 삶에 더 치중하게 됐고, 공부도 운동도 악기도 다시 시작했다.

결혼과 육아가 목적이 아닌, 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나가기 위한 작업들을 시작한 셈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계획적으로 무언가를 배우고싶어하는 사람이었고, 욕심도 많았고, 관심사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걸 인정받고 싶어한다. 다만 그걸 몇년간 잊고 살았던 것 뿐이다.



열시간이 넘는 산행 덕분에 아주 근본적인 내 성향을 다시 깨닫게 됐다.

지금의 삶은 아주 만족스럽다. 이 모든게 한라산에서 맞이한 일출 덕분이다. 새해의 좋은 기운을 받아, 남은 올해도 이대로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시작부터 다른 2016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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