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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륜 May 15. 2016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

나는 더이상 언론사에 입사지원서를 쓰지 않았다.

어쩌다 병원에서 일하게 됐느냐, 어떻게 해서 병원 홍보팀에 있게 됐느냐 라는 질문을 받이 받는다.

내 고등학교, 대학교 생활의 목표는 오로지 '언론사' 였고,

PD 혹은 기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대학교 3학년때까지의 커리를 쌓아왔다.


중국어를 전공하면서 언론정보를 복수전공 하겠다는 플랜도 이미 대학교 원서를 넣으면서 결정했었고,

중국어를 전공한 이유도 '언론인이 되었을 때 내 무기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 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중국어는 중학생 때부터 조금씩 배워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생 때 수많은 대외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직업에 대해서 많이 알게되고,

한편으로는 언론에 대한 회의감도 조금씩 들면서 좀 더 여러곳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중국어를 살려서 해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선배들, 공기업을 목표로 하는 친구들, 내가 관심있던 문화제와 영화제에서 일하는 사람들...


수많은 선택지와 경우의 수를 놓고 참 많은 고민을 했던 대학교 3~4학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나에게 큰 박수를 쳐주고 싶은 것은, 그 고민을 머릿속에서 끝낸게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 해결했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주저없이 지원을 했고, 덕분에 세 곳의 각기 다른 회사에서 전혀 다른 업무로 인턴을 해볼 수 있었다. 코트라 북경무역관, JTBC보도국, 그리고 NCSOFT.


이렇게 연관성이 적은 회사들을 경험하는 것은 리스크도 크다.

커리어의 연속성이 떨어지고 진짜 취업을 준비할 때엔 '철새'같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경험들 중 무엇 하나도 버릴 수가 없다. 현재의 내 삶을 만족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줬기 때문이다.



1. KOTRA 북경무역관

해외에서 한 번 일해보고 싶었던 나에게 '해외전시인턴' 이라는 제도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한국무역협회에서 언어권별로 일정 인원을 뽑아, MICE관련 회사에 파견을 보내 3개월 가량을 일하도록 만드는 제도다. MICE관련 회사에는 KOTRA,한국관광공사를 비롯해 일반 로컬 MICE 회사들이 포함된다.


2012년 상반기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서류와 면접(언어면접 포함)을 운좋게 통과했다. 당시 나는 그렇게 높은 토익점수나 HSK점수가 없었음에도 다행히 중국어 면접을 만족스럽게 봤다. 7월에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각 언어권별 합격자를 다 모아놓고 2~3주에 걸쳐 교육을 진행한 뒤, 파견지를 정해줬다(지금은 방식이 바뀌어 처음부터 자기가 지역을 선택해 선발한다고 한다)


우리가 갈 수 있는 선택지는 북경,상해, 시안, 홍콩, 정저우, 대만 등 여러 중화권 도시가 있었고, 이중에서도 코트라냐 관광공사냐 로컬이냐가 나뉘었다.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북경 코트라무역관에 배정받았고, 중국에 있는 코트라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곳이기에 다른 지역으로 간 동기들보다 더 만족했다.


가서 내가 한 일은, 중국 시장조사 보고서를 만드는거였다. 국내 기업 중 코트라에 의뢰해 특정 제품에 대한 시장조사를 부탁하는 곳이 많다. 대부분 해외진출을 노리고 사전조사를 진행하는 건데, 예를들어 '아이들 영양제'라고 한다면 현재 중국에서 팔리는 아이들 영양제의 종류, 가격, 성분, 그리고 식약품 관련된 법안과 수입에 관한 규정 등을 조사하고 정리해 페이퍼를 만드는거다.


중국인과 대면할 기회는 적었지만, 중국에 떠도는 수많은 자료들을 선별하는 실력과 여러 규정들을 검토해 사업에 필요한 시각을 기르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의 흐름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또한 '전시인턴'이라는 명목하에, 북경에서 진행되는 (코트라가 참여하는) 전시나 설명회에도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 때, MICE 회사들도 많이 접하게 된다.


이런저런 행사를 다니면서 현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과 관련된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떤 회사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국내 대형 MICE 회사의 한 여자 담당자가 지나친 부심(인턴 주제에 지금 나한테 질문을 해? 내가 너희 질문에 답변해줄 군번이야? 나는 너랑 스타트가 달라ㅋ라는 느낌) 으로 아주 싸가지 없게 굴어서 그 이후에 MICE 회사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지기도 했다.



2. JTBC 보도국

언론 전공을 하면서, 내가 아무리 언론사에 관심이 좀 시들해졌다고는 하지만 언론사는 언제나 내 희망 1순위였다. 특히나 중앙미디어그룹은 내가 좋아하는 언니가 다니는 회사였고, 획기적인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회사라는 인식이 강했다(타블로이드판으로 판형을 바꿨을 때, 그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남아있다).


종편의 출범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그런 중앙에서 보도채널을 만들었을 때,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보도국에서 인턴을 하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좀 더 내가 가고싶은 회사를 가까이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JTBC는 손석희 사장이 부임하기 전이었고, 여러 매체의 경력기자들을 뽑아와서인지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했다. 대통령 취임 직전인데다가 내가 정치부에 있었기 때문에 더 바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한 일은 뉴스의 제작을 돕는 일이었다. 방송뉴스는 단순한 취재보다도 '그림'이 중요한 때가 많다. 보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래픽을 만들어야 하고, 사진이나 과거영상을 찾아놓아야 하기도 하고, 특정인의 발언중 일부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런 필요한 자료를 찾고, 청문회나 기자회견 등의 워딩을 따서 필요한 부분을 체크해놓고, 혹 외부에 있는 기자가 리포팅 음성 등을 녹음해서 보내면 그걸 들고 편집실로 가서 리포트 편집을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뉴스의 제작현장에 있는 일은 즐거웠다. 하루하루가 다이내믹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나는 기자로 살기 싫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남들이 보지 않는 리포트(지금에야 JTBC가 많이 위상이 높아졌지만, 당시엔 아니었다)를 만들기 위해 나의 24시간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과, 저녁이 없는 삶,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엄마가 되는 것이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기자 사명감'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사로 세상을 바꾼다' 라는 사명감을 갖기엔 우리나라 언론인은 '직업인'에 가깝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루하루 리포트를 채워가기 바쁜, 저녁과 일상이 남들보다 적은, 그런 고된 직업인.


1월부터 4월까지 JTBC 보도국 인턴을 마치고, 나는 더이상 언론사에 입사지원서를 쓰지 않았다.



3. NCSOFT

언론사 입사를 갈망하지 않게되자, 다른 회사들에 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졸업 전이었기 때문에 하계인턴을 중심으로 원서를 썼는데, 광고회사, 홍보회사, 일반 제조업회사를 비롯해 항공사, 유통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NCSOFT였다. 내가 살릴 수 있는 또다른 전공인 '중국어'를 살렸다.


중고등학생 때 또래 여자애들보다는 게임을 많이 했던 덕분에, 회사가 낯설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해 본 NC게임은 리니지가 전부였고 (다른건 전부 넥슨) 요즘 게임트렌드도 전혀 몰랐다. 또한 내가 지원한 '아트PM'이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채용홈페이지에 나온 설명을 읽어볼 뿐, 더이상 아는게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단 원서를 썼고, 온라인으로 인적성검사를 보았고, 면접을 보게됐다.


이번에도 나를 붙게 한 이유는 중국어때문이었다.

면접장에는 세 명이 들어갔지만, 한 명만 뽑겠다고 했다. 이미 서류와 인적성을 거치고 올라온 사람들이기에 나도 바짝 긴장하고 들어갔지만, 첫번째 질문인 '중국어 자기소개'를 듣고는 합격을 80%정도 예상했다.


나 외에 다른 면접자 한 명은 중국에 오래 살다왔다고 해서 면접관들의 기대가 컸지만, 기대만큼의 중국어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마도 중고등학생 때 한인타운에 살면서 한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국제학교를 다닌 것으로 보였다. 면접관은 "기대가 컸으나 그에 미치지 못해 많이 실망한 케이스" 라고 했다.


또 한명의 남자는, 부산에서 올라온 중문과 학생이었는데, 중국어 실력도 모자랐을뿐더러 면접에도 서툴렀다. 이 면접이 처음이라는 그 남자는 너무 떨었고, 융통성 없게 '외워온 것을 그대로 읊어야 하는' 성격이었다.

둘 모두 게임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서류를 붙여주고 면접장까지 올라오게 만든 것에, 우리나라 채용 시스템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라고 하는 게)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가 깨닫게 한 면접이었다.


나를 NC에서 일하게 한 것도 중국어였지만, 나오게 한 것도 중국어였다.


NC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복지에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다니면서 나쁘지는 않았으나 나는 결과적으로 팀을 잘못만났었고, 이 업무에서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게임을 런칭하고 나면 잘리지 않을까 전전긍긍. 하지만 뭐 1년 내 런칭한다던 그 게임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다).


인턴 두달 후, 채용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 팀 특성상 6개월 계약직 후 전환이었다. 우선은 계약직으로 일을 이어나갔지만 그 채용프로세스가 못마땅했고 여왕벌 스타일이던 여자 과장의 행실은 갈수록 가관이던 찰나,학교수업을 병행하느라 도저히 지속할 수가 없어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세 곳의 회사를 거치면서 내가 직업을 선택하는 나름의 기준에 대해 그래도 가닥이 잡히게 됐다.


1.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명확할 것
2. 업무를 하면서 이와 관련된 비전이 보일 것
3. 지루하거나 비슷한 업무의 반복이 아닐 것
4. 나를 자극하는 일일 것
5. 안정적이고 좋은 복지혜택을 갖추고 있을 것


이 조건을 갖춘 회사, 이 조건에 맞는 직업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않았다. 하지만 수차례의 타 회사 경험이 내게 좋은 기준이 되었고, 덕분에 지금의 회사에 더 만족하는 이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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