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성향
1. MBTI가 유행하기 전, 우리는 혈액형으로 사람을 규정하곤 했다.
A형은 섬세하고, B형은 자유롭고, O형은 대범하고…
지금 돌아보면 그 네 가지 성격이
한 사람의 세계를 대표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땐 너무 자연스럽게 믿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늘 라벨로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복잡한 인간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
서로를 쉽게 분류하고, 조금 더 이해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방식.
요즘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MBTI다.
“F니까 감정적인 사람일 거야.”
“J니까 계획형이겠네.”
“E니까 말이 많겠지?”
우리는 사실과 관계없이
라벨을 붙이고 나면 그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된 듯한 착각을 한다.
2. 하지만, 나 자신에게 그 라벨을 붙여 보려고 하면 늘 헷갈렸다.
나는 어떤 MBTI를 해도 “이게 나 맞나?” 싶은 지점이 있었다.
사람들과 있을 때의 나와
일할 때의 나,
혼자 사색할 때의 나,
꿈을 떠올리는 나,
사랑을 말하는 나.
이 모든 모습이 하나의 MBTI로 고정될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너무 INFJ 같고,
어떤 날은 완벽히 ENFP 같고,
그럼에도 검사지에서는 ESFJ가 나오고,
일하는 나는 ENTJ의 구조력에 더 가까웠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MBTI는 정말 나를 설명하는 걸까?
3. 일하는 나와 평소의 내가 MBTI가 정말 다를 수 있는지.
그래서 오랜만에 GPT와 대화를 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명료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일할 때의 나는
전략을 세우고, 구조를 만들고, 일정과 목표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사람.
문제 해결과 빠른 실행이 우선이고,
현실적인 판단과 예측이 삶의 중심이 된다.
이건 분명 INTJ나 ENTJ 같은 NTJ 성향에 가깝다고.
그런데 평소의 나는 완전히 달랐다.
감정의 결이 깊고,
말의 의미와 뉘앙스에 예민하고,
사람과 세계를 느끼는 방식은 훨씬 섬세하며,
사고는 서사와 감정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고.
혼자 있을 땐 INFJ 같고,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면 ENFP처럼 감정의 확장이 일어나는 게 너라고.
나는 결국 깨달았다.
‘나’는 하나의 성향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걸.
4. 그리고 MBTI 자체에도 ‘역할 편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MBTI 질문들을 다시 보면
사회적 역할, 일, 관계, 협업, 갈등 상황 등
사회적 자아에 대한 질문이 훨씬 많다.
그래서 사회적 역할이 강한 사람은
일할 때의 모습이 더 크게 반영되고,
일상·감정 중심인 사람은
평소 자아가 MBTI를 결정짓는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는 평소엔 밝고 말도 많은데
회사 가면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고
할 일만 조용히 하는 ISTJ처럼 변한다.
그 친구의 MBTI가
회사에서의 모습인지,
평소의 모습인지,
어느 쪽을 더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는 뜻이다.
결국 MBTI는
“당신의 본질은 이거예요”라고 말하는 검사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역할의 자아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에 가깝다.
5. 그 사실을 깨 닿고 나니,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됐다.
나는 일할 때와 사랑할 때의 내가 너무 다르고,
그 둘 모두 나에게 중요하다.
그래서 MBTI가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복합적인 성향 때문에
나와 깊이 맞는 유형도
하나의 기준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일의 세계에서는 NTJ 같은 사람들과 잘 맞고,
사유의 세계에서는 ENFP나 ENTP 같은 사람들과
대화와 감정이 더 잘 맞는다.
나는 이제 MBTI를
나를 가두는 라벨이 아니라,
내 안의 여러 자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언어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