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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침 오늘 아침 Jun 03. 2023

차를 마시는 기물이 주는 위로

계절을 잘 타는 몸


“귄,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

이 즈음부터 저는 때 이른 여름 맞이를 하듯 새벽에 잘 일어나는 몸이 됩니다. 그렇다고 저를 범 지구적 자본주의가 만든 #아침형 인간 카테고리에 넣지는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날이 서늘해지는 시월 즈음부터는 몸에 무거운 추를 단 듯 일어나지 못하는... 네. 맞습니다. 부지런한 노력형 인간보다는 단출하게 < 계절을 잘 타는 몸 >입니다.


매년 5월과 9월 즈음 일어나는 시간이 바뀌는 것은 루틴을 선호하는 제겐 큰 불편이라 수년간 노력했지만  바뀌지 않더군요. 본성 내지는 체질(?)이라 해도 스트레스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방도를 찾던 중 이른 아침에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 3년 정도 되었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하고 이를 닦고 아침 일기(보다는 메모에 가까운 글)를 쓰는 것이 한 블록, 영어 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 것이 두 번째 블록,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차를 마시는 데 남은 시간을 모두 씁니다. 여름이 곧 들이칠 듯 해가 길어질 즈음에는 찻자리가 삼사십 분을 채웁니다. 바람이 좋은 날에는 간혹 아니 사흘이 멀다 하고 앞서 나열된 것 중에 공부나 독서를 다 제치고 한 시간이 채울 때도 있습니다. ⠀⠀⠀⠀⠀

이렇다 보니 차를 마시는 기물은 익숙함을 넘은 무엇이 되었습니다. 해서 지난가을 당신께서 보내주신 청에 마음이 흔들 릴 수밖에 없습니다. 토림도예에서 빚은 무유개완이 맥파이 앤 타이거의 안목을 통해 제게 전해지고, 오수 작가님의 이끼수리방에 잠시 들렀다가, 귄 작가님의 킨츠기로 다시 제게 왔습니다. 지난날 제게 남기신 말씀처럼 '수년에 걸쳐 여러 공예가의 손을 거쳐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 기물이 되었습니다.

번듯하고 곱게 차려진 것에 내비치는 무심함은 원체 모나고 비뚠 성정을 가진 탓도 있지만, 그간 잘 갖춘 것을 내보이는 것이 사명인 일을 하면서 고되다 할 만큼 치이고 문대어진 탓이라, 반면 이처럼 거칠게 지난 시간을 드러내는 것에는 더 마음이 갑니다. 어쩌면 이는 기물에 비춰보는 나를 문지르고 쓰다듬는 것 일지도 모릅니다. 저 혼자 잘 견뎌 온 것처럼 보여도 곁을 지키는 인연들이 고치고 보살펴 이곳에 이른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그러니 천일은 훌쩍 넘긴 지난 시간의 곱절을 곁에 두고 다시금 아낌없이 쓰겠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_ 사유 드림


2023년 5월 다시 돌아온 나의 개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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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라는 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속한 사람이나 동식물만이 아니라 기물을 통해서도 가능함을 알았던 시간이었다. 날마다 같은 찻잎이라도 다른 맛을 내는 것을 보면서 마치 숨 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면서 그래서인가... 내가 놓친 시간을 알아챈 그 순간 손에 쥔 잔을 깨뜨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통증 같은 감각은 내가 놓친 것이 단순히 잔이 아닌 어떤 벗보다 가까이 두고 쓴 기물인 탓이다. 깨진 잔을 앞에 두고 지켜보며 나를 경계할 것으로 삼아야 할지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지 생각이 끊이지 않는 날. 다른 때와는 달리 질척이다 싶게 버리지 못하고 거둬 안고 있을 것이 분명한, 나의 개완 이야기는 여기까지.' (202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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