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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침 오늘 아침 May 31. 2023

일로 만난 것들이 전해주는 맛

01. 일하는 사람을 위한 사유

너도 나도 창업을 하고 싶고, 모든 사람이 퇴사를 꿈꾸는 이상한 시대. 그래서 매번 좀 다른 선택을 했던 나는, 면접을 보려고 한다. 다시 직장인이 돼야지. 그때도 그랬다. 모두가 워라밸을 외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찾을 때. 나는 하루에 수 십 개의 메일을 보고 수 백 개의 카톡을 받고, 그해 7월 전기세 청구서 1,160원 8월 출장비 정산서 1,160만 원을 기록했다. 그 결과 다음 해 연봉 협상은 입사 시 금액의 25%가 아닌 2.5배... 그 밥값 하느라 이듬해는 보다 많은 담배를 샀고, 그 보다 많은 술을 마셨고, 토 나오게 일을 하고, 잊지 못할 좋은 동료를 얻었다.



직장인이란 하루하루가 이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 힘들지만, 바로 옆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동료들과 전우애(유대감 정도로는 부족한 맛)의 중독성이 크다. 또 하나 평생 만져보기 어려울 것 같은 예산과 규모의 프로젝트를 회사 돈을 받으면서 경험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쾌감이 있는데. 두세 달 동안 사력을 다해 준비한 현장이 2-3일 사이에 세팅과 오픈, 철수되는 장면을 지켜보면 지독한 성취감이 제법 크다. 연차가 낮을 때는 저게 뭐라고 저러나 싶은 것이 어느 날 어느 순간 그 맛에 중독되면 되돌아오기 쉽지 않다. 그러다가 보면 여름날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포화 속을 향하는데 나름의 전술이라는 것이 생기고, 부상병과 패잔병을 끌어안고 또 다음 전장을 향하는 미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랬던 내가 마지막 퇴사를 한지 일 년 하고도 넉 달이 지났다. 4대 보험 납입자의 은혜로운 실업 급여를 6개월간 수령하고 재테크의 세계와 N 잡의 소용돌이를 지나왔다. 정서경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바다에서 온 나는 산에서 사느라 고통스러웠고, 산새 험준한 직장인이란 봉우리를 내려와 강원도와 제주도 그리고 부산 바다를 떠돌았는데. 그새 신상 수렵채집인의 생활이 익숙해진 것인지, 서울을 떠난 몇 달을 제외한다면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잠을 자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 앞 국회도서관을 출퇴근을 하듯 들르고 도서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런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이가 그럴 바에는 다시 직장인이 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 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일상.



일을 좋아한다.
일 잘하는 호호 할머니가 되고 싶다.


가치 어쩌고 책임 저쩌고 하는 것 외에 이것저것 차치하고 서라도 나는 그렇다. 그럴 수 있다. 나 같은 인간도 있다. 지난 연휴 전날에는 4년 전 나와 상황이 아주 유사한 상황에 처한 36세 차장님과의 상담이 있었다. 약속된 40분을 훌쩍 넘기고 2시간을 꽉 채운 그녀와의 시간은 잠시 잊고 있었던 그때를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남긴 상담 후기는 가슴을 찡하게 만들고, 같이 일하고 싶은 직장 동료가 꿈이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몇 달간 신청된 상담을 보면 비슷한 고민을 하고, 다들 비슷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마치 그런 주제만 골라서 오는 것처럼 좋은 동료를 만나고 싶고 괜찮은 사수로 남고 싶다는 직장인들. 나는 천운과 같은 기회를 얻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펴지고 등을 바로 세우게 되는 상사와 허술하고 부족한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 꾸게 한 동료를 만났지만, 대부분의 조직에서 그것은 로또 같은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 순간은 분명 온다.
그것도 우연처럼 어느 날 문득,


때로는 이미 왔는데 내가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대과거의 내가 그랬다) 그러니 잘 살펴보자는 말을 해준다. 그러다 아주 가끔 강인한 상담자를 만날 때 만은,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나도 누군가에게는 개새끼일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빌런의 끝장판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 새끼에게 측은지심이 생기는 때가 돼야, 지옥이 끝난다는 것'까지 셋 중에 하나 정도는 말해준다. 이례적이라 하는 것은 다 알고 당해도 제법 아픈 걸 아니까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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