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번역가로 일하다 보면 가끔 번역이나 감수 외에 다른 일이 요청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번역 작업이 많은 에너지를 쏟는 일이다 보니 가끔 다른 작업이 오면 재밌기도 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일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동안 영상 번역가로 일하면서 해봤던 새로운 일들을 몇 가지 소개할까 합니다.
영상 번역가가 더빙 감수를 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자막을 감수하던 작품이 더빙으로도 진행되면서 일관성을 맞추기 위해 더빙 파일의 감수 작업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기회가 닿아 아직까지 종종 더빙작 감수 요청이 들어옵니다. 단순히 더빙 번역 감수라기보다는 전체적인 QC에 가깝죠. 예전에는 더빙 스튜디오와 직접 메일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요즘엔 번역 업체를 통해 진행해서 직접 연락할 일은 없습니다. 더빙 번역가가 번역하고 성우들이 녹음하면 제가 대본과 함께 내용을 확인한 후 수정 사항을 더빙 스튜디오로 전달합니다. 시각에 집중하는 자막 감수와 다르게 더빙 감수는 청각에 집중해서 감수를 진행합니다. 영어 원문과 번역이 맞는지, 대본에 있는 대사가 빠지진 않았는지, 대사 외에 잡음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에코(소리 울림)나 필터(전화/라디오 음성) 효과가 제대로 들어갔는지도 꼼꼼히 확인합니다. 일정이 촉박할 때는 효과음이 들어가지 않은 성우들의 목소리만 입힌 파일이 올 때도 있습니다. 매일 영어만 듣다가 우리 말을 들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고객사에 따라 번역가나 감수자가 직접 작품 소개 글을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임의로 글을 쓰는 건 아니고 영어 원문이 제공됩니다. 번역자든 감수자든 해당 작품을 작업한 사람이 번역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작품 줄거리나 소개 글이 대부분인데, 번역된 글이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제삼자가 작업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번역/감수한 작품의 텍스트 번역은 의뢰가 오면 꼭 하는 편인데, 종종 다른 작품의 텍스트를 번역해 달라고 요청이 올 때는 난감합니다. 용어나 줄거리도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그런 경우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편입니다.
감수 작업이 아닌 이상 같은 번역가끼리 동료 번역가를 평가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번역가 평가는 보통 회사 내부에서 처리하는 일이니까요. 다만 몇 년 전에 한 업체의 요청으로 일정 기간 동안 프리랜서 테스트를 본 번역가부터 현직에 있는 번역가들의 파일을 확인하고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업체에서 미리 평가할 작품을 정해주고 주어진 항목에 따라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예전에 기술 번역 회사에 다닐 때도 이런 유형의 일을 해봤던 터라 마냥 생소하진 않았습니다. 회사 내부에서 처리할 수도 있지만, 같은 번역가의 시선에서 정확한 평가를 듣고 싶어 진행한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이런 요청은 오지 않습니다.
위에 언급한 일들은 번역가가 해야 하는 필수 작업은 아닙니다. 번역/감수만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가끔 이렇게 새로운 작업을 하면 리프레시가 됩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영상 번역 외에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분들도 종종 보입니다. 저처럼 기술+영상 번역 경험이 있는 분들도 있고, 영상 번역을 하면서 웹툰이나 출판 번역도 같이 하시는 분들도 봤습니다. 10년을 일해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분야가 참 많습니다. 새로운 일은 늘 긴장되지만, 다음엔 또 어떤 재밌는 일을 마주할지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