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_12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늘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았었다.
처음 살던 집 마당에는 큰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아침이면 무화과를 따먹으러 온 새들이 지저귀는 바람에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그 나무 아래엔 꽤 큰 닭장도 있었다.
학교 앞에서 팔던 노란 병아리 세 마리를 집에서 키웠었다. 그 병아리가 자라 어미닭이 됐고 그 닭이 낳은 병아리가 또 자라 닭이 되다 보니 아빠가 직접 그물을 짜서 닭장을 만들어줬었다. 여섯 마리 정도를 유지하며 매일 아침 나는 달걀 프라이를, 아빠와 오빠는 날달걀을 먹었다. 이년을 넘게 키우던 닭들을 뒷산에서 내려온 족제비들에게 하루아침에 빼앗겨버린 그날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대문 앞엔 개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코코는 동네에 돌아다니던, 지금으로 말하자면 유기견이었다. 항상 그런 개들을 데리고 집에 오는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여간 고생하신 게 아니었다.
그 집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다.
내가 대학에 가게 되던 해에 갑작스럽게 이사해 살았던 두 번째 집도 작은 마당이 있던 주택이었다.
원래는 시멘트 바닥의 마당이었는데 아빠가 직접 잔디를 심고 돌을 두어 꽤 운치 있는 마당을 만들었다.
역시나 대문 곁엔 호두라는 개가 있었다.
고모네가 키우던 골든 레트리버였는데 천사견이라는 별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썽꾸러기였다.
두 번째 집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산 추억은 없다. 나도 부산으로 대학을 와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고 오빠도 진해에서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따금 부모님을 뵈러 갈 때나 지냈던 곳이었다.
그 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돌이다. 아빠가 한창 수석에 빠져있던 터라 집 안 밖에 갖가지 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돌에는 다 의미가 있다는 아빠의 철학 덕분에 그 많은 돌들을 다 이고 지고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갔다.
세 번째 집은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계신, 엄마 아빠가 남은 여생을 보내실 시골집이다. 가족들의 감나무 밭이었던 땅을 엎어 아빠가 직접 설계한 집을 지었다. 거실 한 복판에 돌 장식장을 짜넣은 것도 아빠의 계획이었다. 시골집이기에 앞뒤로 마당이 꽤 넓다. 주변에 가까운 집은 딱 두 채. 나머지는 논과 밭 그리고 산과 하늘이다.
이 곳에서도 가을이라는 개를 키웠는데 시골 사람들이 사납게 짖어대는 가을이를 무서워해서 고모부 댁에 입양 보냈다.
앞마당에는 철마다 먹을 야채들을 키우신다.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난 몇 개월 뒤에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게 되어 자주 오곤 하는데, 덕분에 야채값이 줄어 참 좋다.
뒷마당엔 엄마가 담근 장들이 담긴 항아리, 장독들이 가득하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만든 된장과 고추장만 먹으며 자라서 그런가 된장찌개는 꼭 엄마 된장을 넣어줘야 제대로 된 맛이 나는 것 같다.
집 앞 베란다에는 아빠가 만든 평상도 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 가을날에 평상에 앉아 먹는 식사만큼 맛있는 게 없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는 아빠의 솥뚜껑에다 시골에서 잡은 돼지 한 마리를 구우면 세상 천국이 따로 없다.
시골집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힘들 때마다 평온한 휴식을 취하러 가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처음 집만큼이나 애정이 많이 가는 마지막 집이다.
집 가꾸기는 아빠의 몫인데, 세 군데의 집 각각 다른 모습의 집들이었지만 딱 하나 늘 같은 곳이 있다.
바로 담장에 핀 장미다.
첫 번째 집에도, 두 번째 집에도, 마지막 시골집에도 아빠는 항상 담벼락 곁에 빨간 들장미를 심으셨다.
그래서 5월 이맘때쯤이면 붉게 핀 장미들이 집을 감싸 안고 있다.
들장미들은 꽃집에서 사는 장미들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꽃이 크다. 여러 장미가 모여 피어있기도 하고 키도 제법 크다. 색도 붉은 것도 있고 약간 분홍빛이 도는 것도 있고 대게 붉은색을 지니지만 가까이서 보면 조금씩 다 다르다.
흔히 꽃다발로 받아보는 장미가 부드러운 정열 같다면 같다면 들장미는 거침없이 불타오르는 정열 같다.
여름이 코 앞에 온 듯한 이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 꽃을 보러 매 년 이맘때엔 꼭 엄마 아빠가 있는 집을 찾아가게 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붉게 핀 장미들을 보며 문득 왜 하필 장미일까 싶어 엄마에게 물었다가 처음으로 엄마 아빠의 연애시절 이야기를 듣게 됐다.
우리 아빠는 무뚝뚝함으로는 내로라하는 남자다. 그 마음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인데 그게 밖으로 표현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사람이다.
연애시절이라고 달랐을 리 없다.
그랬던 아빠가 엄마와 함께 외삼촌네 집에 갔다가 외삼촌이 숙모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걸 보고 난 며칠 뒤에 집에 장미 꽃다발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장미가 보통의 장미와는 모양새가 좀 다른 것이 가시가 그대로 있고 장미 잎에는 먼지가 군데군데 묻어있었다고. 알고 보니 아빠가 일하는 회사 담장에 피어있는 들장미를 꺾어다 나름의 다발을 만들어서 엄마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때 그 장미가 5월이면 우리 집 담장에 피어나는 장미와 똑 닮았다고. 그래서 엄마는 장미를 볼 때면 그날 생각이 가끔 난다고 했다.
한 번도 엄마 아빠를 서로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에 아빠의 장미 이야기는 나에게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냥 장미가 참 예쁘네.라고 생각했는데 엄마 아빠의 젊은 시절 사랑스러운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생각하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빠도, 내겐 아빠지만 엄마에겐 사랑하는 남자이고 엄마도, 내겐 엄마지만 아빠에겐 사랑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매년 5월 우리 집 담장에 아빠의 장미가 가득 피어나는 모습을 오래오래 볼 수 있기를.
-비 오는 어느 날, 엄마가 보내준 우리 집 담장의 장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