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_18
우리 아이는 아직 네 돌이 채 지나지 않은, 다섯 살이지만 만 나이는 세 살인 남자아이다.
오늘 티브이를 보는 일로 아이와 실랑이가 있었다.
정해진 시간만큼 티브이를 보게 하는데
모름지기 티브이는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법.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아이가 하나만 더 보고 싶다며 떼를 썼다.
이미 한 번 더 보고 싶다 했을 때 하나를 더 보여줬음에도 계속 하나를 더 보겠다고 울며 보챘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이에게 스스로 끌 기회를 여러 번 줬으나 울음을 그치지 않아 다섯까지 세고 나면 엄마가 끄겠다고 일러둔 뒤 내가 껐다.
당연히 아이는 넘어가며 울어댔다.
자기가 끌 거라며 소리 지르며 울었다.
예전 같았으면 울음소리가 듣기 싫고 그 바람에 내가 화가 나서 더 아이에게 윽박지르고 짜증을 부렸을 텐데 오늘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수십 권 읽어온 육아책의 효과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가 싶었다. 내 안에 오은영 박사님이 계신다는 생각으로 감정을 다스렸다.
용을 쓰고 울던 아이는 바지에 오줌까지 쌌다.
침착해야 해. 침착해야 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엄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엄마가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울음을 그치고 와서 이야기하라 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내게 와서는 엄마 아빠는 왜 엄마 아빠 마음대로만 해!라고 말했다.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아이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니!라는 생각에 놀라웠다. 그래서 엄마가 마음대로 한 거 아니고 너랑 얘기해서 티브이 시간을 정했고 엄마가 기회도 줬다고 이야기해줬다. 잠잠히 듣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한 말이 ‘집 나갈 거야’였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누가? 엄마가?라고 되물었더니
‘아니, 내가 혼자 나갈 거야.’라고 말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웃음이 나왔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됐다니, 엄마 없이 혼자 집을 나갈 거야!라는 말이 나에게는 이제 나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게 많아요!처럼 들려서 귀엽게 느껴졌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나가면 어디로 갈 건데?’ 물었더니 우리가 곧 이사 갈 아파트 이름을 댔다. 못 참고 크게 웃어버릴 뻔했는데 잘 참아냈다. ‘거기엔 티브이 없는데?’라고 했더니 ‘내가 살 거야 티브이!’라고 받아쳤다.
하하 이런 대화를 너와 하게 될 줄이야! 사춘기인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 했다면 정말 심각했을 텐데 왜 이게 이렇게 귀엽게 들렸나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 나름은 아주 심각한 결단과 이야기였을 테니 엄마는 지후랑 같이 살고 싶은데? 지후가 나가버리면 엄마가 속상할 거야 라고 이야기해줬다.
그러고는 훌쩍이며 서있는 아이 주변의 오줌을 치웠고 아이에게 다시 한번 일러주었다. 이러이러한 경위로 엄마는 티브이를 껐다고. 그랬더니 아이가 울음을 삼키며 다시 한번 티브이가 하나 더 보고 싶었고 자기가 티브이를 끄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오늘은 안돼!라고 하고 싶었지만 육아책에서 그렇게 계속 이끌어 가는 건 아이와 기싸움만 하는 것일 뿐 전혀 이득이 없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래서 아이에게 티브이를 하나 더 보여줄 순 없지만 티브이를 끄는 건 네가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다시 티브이 앞으로 왔고 티브이를 켜줬다. 리모컨을 건네며 스스로 끄라고 했다. 포기를 모르는 아이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하나만 더 보면 안 되냐고 물었다. 더 긴 말하지 않고 네가 티브이를 끄고 올 때까지 의자에서 기다리겠노라 하고서 의자에 앉았다.
망설이던 아이가 티브이를 끄고 왔다.
손을 잡아주고 약속한 대로 같이 씻으러 가자고 했다. 아직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계속 하나가 더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하길래 이해한다며 알겠다고 다독여줬다. 티브이는 보면 볼수록 자꾸 더 보고 싶어 지기 때문에 시간을 정해두고 보는 것이라고. 그걸 지켜주지 않으면 이렇게 엄마도 속상하고 너도 속상한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그러니 다음부터는 티브이가 너에게 자꾸 나를 봐달라고 해도 네가 먼저 아니야 티비야 다음에 봐.라고 말해주자고 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나에게 티브이 역할을 시키고 자기에게 말을 걸어 보라 했다. ‘조금 더 봐~~ 엄마한테 울며 떼써봐~~’라고 말했더니 ‘안돼! 다음에 볼게!’라고 꽤나 의미심장한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
예전 같았으면 서로의 감정이 극으로 달아 나도 소리를 지르고 아이도 울다 지쳐 잠드는 게 끝이었을 텐데 너도 나도 참 많이 자랐다 싶은 저녁이었다.
길지 않은 실랑이를 끝내고 잠자리에 누워 다시 한번 아이의 욕구를 이해해주고 사랑한다고 쓰다듬어 줬다. 그러고 나니 내 마음도 편하더라.
다섯 살 아이에게 ‘집 나갈 거야!’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안심해도 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미소 지어지는 오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