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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뗄라 Mar 06. 2019

#3 흑인 무용수에 대한 인종차별과 극복 - 아서 미첼

#3 미국 발레에서의 흑인 무용수에 대한 인종차별 연구

퇴사를 준비하는 무용과 출신 마케터,
그리고 내 마음대로 끄적이는 문화예술과 무용.   


흑인 무용수에 대한 인종차별과 극복 - 아서 미첼


   미국사회에서 무용계의 인종문제는 미국의 오랜 역사·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종분리정책이 사라지기 전까지 1930년대에서부터 1960년대까지 대부분의 발레학교는 흑인 학생을 받지 않았다(이지원, 2011). 이에 따라 발레가 미국사회에서 보편화되었음에도 흑인과 백인 간에 뚜렷한 차이는 존재했다. 이로써 흑인무용수들은 새로운 발레단을 설립해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대표적인 흑인발레단인 할렘무용단(DTH)는 역사적 산물이자 증거로 오랫동안 존속하였다. 물론 1969년 이전, 유진 폰 그로나(Eugene von Grona) 남작이 결성한 흑인 발레단인 미국 니그로 발레단(American Negro Ballet)가 등장하였지만, 곧 이내 소멸되었다(조앤카스, 1998). 미국사회에서 다인종 발레단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주류(主流) 발레단에서 활동한 주요 흑인 무용수의 계보는 찾기 어렵다. 그 중 할렘무용단을 설립한 아서 미첼은 1950년대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미국사회에서 뉴욕시티발레단(New york City Ballet Theatre, 이하 NYCB)의 주역무용수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재조명하기 마땅하다.      



▶ 아서 미첼(Arthur Mitchell)     

   미국 발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흑인 무용수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아서 미첼(Arthur Mitchell)은 1955년 뉴욕시티발레단에서 15년간 주역무용수로 활동하다 할렘가로 돌아가 무용단을 창립했다(The New York Times, 2004).


   아서 미첼은 1934년 3월 27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미첼이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투옥으로 인해 가족의 재정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에 구두닦이에서부터 바닥 청소, 신문 배달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학교 상담교사의 권유로 전문적인 발레 수업을 이수하기 위해 캐서린 던햄 스쿨(Katherine Dunham School of Dance)의 오디션에 응하게 되었다. 춤의 재능이 있던 미첼은 장학금을 받으며 훌륭한 무용수의 길로 접어들었고, 1952년 무용을 전공한 최초의 흑인 남자 학생이었다.


   이후 아서 미첼은 뉴욕으로 넘어가 뉴욕발레의 공식 학교인 아메리칸 발레 스쿨(American Ballet School)에서 고전적인 발레를 지도 받으며, 전액 장학금을 수여 받았다. 그렇게 미첼은 1955년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지도 아래 최초의 흑인 발레리노로 뉴욕시티발레단에 입단하였다.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주요 계급으로 승급하였으며, 「한 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호두까기인형(The Nutcracker)」, 「아케이드(Arcade)」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였다. (Barbara.F, 2006) 그 중에서도 아서 미첼을 대표하는 작품은 「아공 (Agon)」이다. 그는 아공의 파드되에서 주역을 맡으며, 큰 명성을 쌓았다. 이는 발란신이 미첼을 위해 특별히 안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시대적 상황은 흑백 인종 분리정책을 고수하던 시기였으며, 흑인과 백인 전용구간이 따로 구분되어 있을 만큼 흑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고조된 시기였다. 극장에는 백인이 흑인과 함께 드나들지 않기 위해 백인을 위한 문과 흑인을 위한 문이 나뉘어 있었다.(안희경, 2015).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주역 무용수로 흑인을 택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미국의 남부 지역 방송사들은 이 작품을 방송하기 거부했고, 일부 관객들은 흑인과 백인이 같이 파트너를 한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김윤수, 20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공」은 할렘무용단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공연되었다.


   또한, 아서 미첼은 1966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개최딘 흑인 예술 세계 축제(World Festival of Negro Arts)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 흑인 무용단 (American Negro Dance Company)을 조직했다(Lynn.G, 2005). 그리고 2년 뒤, 1968년에는 미국 국제 협회로부터 지정받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 국립 발레단(National Ballet Company of Brazil)을 설립하였다(The history Makers, 2016). 이렇게 그는 점차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 잡았으며, 뉴욕시티발레단에서 최초의 흑인 주역 무용수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69년, 아서 미첼이 뉴욕시티발레단의 정상을 고수하고 있을 시기에 큰 사건이 터졌다. 시민권의 운동의 추진력과 더불어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Jr)목사의 암살 사건 발생으로 인해 그는 동일한 흑인으로써 강력하게 반응하게 되었고, 결국 정든 무용단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미첼은 할렘으로 돌아와 흑인무용수들에게 백인의 고전발레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클래식 발레 무용단을 설립했다(The New yotk Times, 2004). 앞서 말했듯이 미국에서는 현대무용과 재즈 무용단에서 스타가 된 흑인들이 많은 반면, 클래식 발레에서는 흑인들에게 성공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미첼은 자신이 무용단을 설립하는 보답의 길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발란신과 커스테인의 격려를 받아 카렐 슈크(karel Shook)의 협조와 포드 재단 기부금의 도움으로 할렘무용단과 학교를 설립했다(조앤카스, 1998).


   우선적으로 아서 미첼은 1969년 할렘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 무용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학교를 개교하였다. 미첼은 1968년 여름부터 차고를 개조하여 무용 수업을 개설했고, 곧 400여명의 학생들을 모았다. 그 누구도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부정적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미첼은 일반적인 무용 교육을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소수인종과 어린이들에게 클래식 무용과 함께 음악, 미술, 현대 무용과 민족 무용 모두를 포함한 교육을 했다(김윤수, 2013). 더불어 성인을 대상으로 한 수업을 개설하여 할렘을 보다 예술교육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학생 수는 나날이 늘어났으며, 1969년 말에는 차고지에서 교회 지하로, 1971년에는 뉴욕의 한 거리로 이전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1990년 흑인 학생들이 뉴욕 시티 발레단의 아메리칸 발레 학교나 로열 발레 스쿨(Royal Ballet School)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러한 쾌조는 1972년 할렘무용단을 창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서 미첼은 흑인 무용수들이 클래식 발레를 출 수 없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흑인들에게 배타적이었던 무용 그리고 미국 발레에서 무용학교와 무용단을 설립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흑인이 무대에 설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그러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로써 미첼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흘러 할렘무용단을 흑백 혼성 무용단으로 변경하자는 권유를 받았음에도 그는 흑인들이 직업무용수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전원 흑인 무용단을 고수했다. 아서 미첼의 작품 「시겔(Siegel, 1972)」에서는 흑인 발레 무용수와 흑인 발레단들을 위해 흑백분리주의, 흑인들의 유산, 차별 대우 등을 비롯한 몇몇의 문제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크리스디 아데어, 1996). 이렇게 할렘무용단은 수많은 국내·외의 성공적인 공연을 통해 소외되어 온 흑인들에게 자긍심과 미국 사회 내 흑인의 지위를 고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미국 발레에서 흑인 무용수의 부족은 재능 부족이 아닌 일방적인 ‘편견’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며, 이를 극복하고 전반적인 사회 풍토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3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흑인발레단으로 부상한 할렘무용단은 2004년, 25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재정적 위기에 처했다. 결국 그 해 말 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무용단이 중단되었다. 이렇게 역사의 장으로 사라진 할렘무용단은 1971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 최고의 흑인 발레단이었다. 이렇게 아서 미첼은 할렘무용단을 비롯하여 무용학교 개교(開校) 등을 통해 흑인은 발레를 할 수 없다는 속설을 깨트리기 위해 힘을 기울여왔고,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The New york Times, 2004).


- 2014. 02월 학부 논문 中 발췌

[미국 발레에서의 흑인 무용수에 대한 인종차별 연구 - Arthur Michell과 Janet Collins를 중심으로-]


* 필자의 학부 졸업 논문입니다.

* 흑인 무용수 차별에 관한 이야기는 총 5부작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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