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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철단골 Sep 24. 2019

이별

고마웠다는 작별 인사

여느 할머니 손주보다 더 특별한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명절 때, 가족 모임 때, 뵙곤 했었다. 철없던 시절이라 뭘 알았을까 싶지만, 그 때의 어렴풋한 느낌만 기억난다. 그 때도 할머니는 뭔가 신세대 같은 느낌이셨다. 그냥 잘 지냈는지 물으시고, 아무래도 자주 뵙지 않으니 데면 데면해 하는 손주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표정이셨다.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한 마디 하시는 법이 없었다. 사랑은 주셨지만 참견은 않으셨다.


한국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외할머니의 병세가 최근 더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고 들었다.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서 할머니를 찾아 뵈었다. 할머니가 위독해지셨다고 해서 주말에 급하게 갔는데, 다행히 기력을 조금 회복하신 후셨다. 오랜만에 찾은 손주를 웃는 얼굴로 맞아 주셨다.


- 외국에서 힘들진 않았어?

- (대답 중요하지 않음)

- 못보고 가는 줄 알았는데 보고 갈 수 있어서 좋네.


같이 간 엄마는 외할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이 그렁 그렁했고, 나는 아직 실감이 안 나고 있었다.


- 고마웠다.


그 한 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아, 이제 할머니랑 영영 못 보는 구나. 그게 실감났다. 자주 뵙진 못했지만, 이렇게 끝이 있는 거였구나. 덤덤하게 이별을 말씀하시며, 고마웠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는 과연 어떤 마음일까. 내가 뭘 했다고 고마우실까. 잘 자라고, 잘 살아줘서? 내리 사랑은 이렇게 무조건적인건가. 나한테 잘하지 않아도, 그냥 잘 살아주기만 해도 고마운, 그런 감정이 가능하긴 한걸까.


- 장기는 기증한다고 했으니까. (내 시신은 좋은 곳에 쓰일 거야.) 장례식은 치르지마. 그냥 조용히 가족들끼리 예배만 해.


끝까지 떠나시면서도 좋은 일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자식들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그냥 홀연히 떠나고 싶은 마음이셨을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장기 기증 사인 서류 접수는 엄마가 했다고 한다. 접수처로 가기 위해 시신실 같은 곳을 지나야 했고, 그 길은 매우 무서웠다고 한다.


- 나 너무 힘들고 의식 없으면 억지로 살려 놓지 마. 지금도 뭐 놓지 말라는데 자꾸 놓고 있어.


할머니는 마음의 준비가 정말 다 되신 것처럼 보였다.


- 너(나)는 그래도 어릴 때부터 엄마한테 잘했잖아. 가방도 사주고. 공부도 잘해서 할머니가 엄청 자랑했어. 너(아내)는 정말 예쁘다.

- 할머니, 할머니가 엄마 준 보석으로 다이아 했어요. (아내 반지 보여줌)

- 아이고, 너무 작아서 어떡하니.


아내가 엄마 다이아 반지 물려 받은 건, 나름 감동적인 스토리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에 불편해서 잘 끼지는 않는데, 이번에는 할머니에게 며느리가 끼고 있는 모습 보여주고 싶어서 끼고 오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 와중에도 다이아가 작아서 어쩌냐고 하셨다. 눈물이 한 번 난 후로는 멈출 수는 없었다. 계속 훌쩍 대면서 서 있었다. 중간 중간 아내가 위로해주려고 내 등을 만져주는 느낌이 기억 났다.


- 너 울어? 왜 이렇게 우니. (엄마 바라보며) 얘 친할머니 돌아가실 때도 이렇게 울었니?

- 엄마 고개 끄덕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증손주를 못 보셨다고 빨리 애 하나 가지라고 했다. 다행히 엄마는 막내라서, 따라서 나도 사촌들 중에 어린 편이라서, 미안한 마음은 덜 했다. 친척이나 주위에서 자식 낳으라고 하면 그렇게 듣기가 싫은데, 할머니는 괜찮았다. 오히려 증손주 안겨드리는 기쁨을 못 드린 것이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인사를 하고 나왔다.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기 전에, 화장실을 갔다가, 할머니와 사진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서 사진 찍자고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사진을 찍었다. 지금 아니면 못 찍을 거고,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할머니와 사진을 남겼다. 할머니가 웃고 계셔서 다행이었다. 웃는 할머니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서, 기억이 잘 안나면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신은 기증하고, 장례는 치르지 않길 원하시고, 손주 며느리에게 준 다이아가 너무 작다고 하시며, 그 동안 고마웠다고 말해주신 할머니여서 너무 고마웠다. 멋진 할머니가 기억에 남을 수 있어서, 여러 가지의 나 중, 손주로서의 나는, 참 자랑스럽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너무 멋진 할머니 손주일 수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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