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이 20명이 될 때까지 관두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직원들은 모두 갑자기 회사가 잘 되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지수 대표는 직원들을 여동생처럼 대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카리스마가 있었다. 직원 중 여럿은 지수 같은 대표를 바로 곁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기업 온라인 커머스에서 근무하면서 MD를 하는 것보다, 지수 같은 사업가와 함께 스타트업을 하는 것이, 나중에 결국 기업체에 들어가더라도, 개인 사업을 시작하더라도 더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지수, 수진, 은진 세 명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지수는 미대생 출신이었지, 패션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같은 학교의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수진과, 웹디자인을 전공한 은진, 셋이 모여서 시작하게 된 쇼핑몰이었다. 수진은 의상 디자인을 전공을 하긴 했지만, 사업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스펙을 쌓기 위해서,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만들었고, 거리가 멀었던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토익 700점을 넘겼다. 거기에 학과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잡일을 도와 교수의 지인과 연이 닿게 되었다. 그렇게 중저가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은진은 작은 화장품 회사의 웹디자이너로 취직했다. 컨셉이라곤 그냥 '저렴한 가격'이 전부인 그렇고 그런 화장품 회사였다. 백화점 브랜드나 대기업에서 어떤 상품이 나오면, 잽싸게 카피 상품을 출시하곤 했다. 그 상품의 웹사이트에 올릴 상세 설명 페이지를 제작하고, 웹에 올리고, 그 때 그 때 프로모션이 걸리는 배너를 디자인하곤 했다.
지수는 졸업이 조금 늦었다. 그 흔한 토익 점수도 없이 취업하는 것이 자신도 없었고, 미대는 도대체 어느 회사에 어느 직군으로 지원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선배들도 대부분 헤메는 것 같았다. 입시 미술을 가르치는 사람은 그나마 잘 된 축이었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프리랜서를 하는 건 불안정했다. 요즘은 그림도 다들 잘도 그려서, 더 이상 차별화가 쉽지도 않았다.
그래서, 필리핀으로 어학 연수를 갔다. 상상한 모습은 알바를 한 비용으로 내가 떠나는, 그런 책이나 블로그에서 본 듯한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그냥 부모님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잘나가는 것도 아니지만, 다행히 사장에게 인정 받아 계속해서 50대 중반에도 상무로 중소기업을 다니는 아버지는 미국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필리핀에 딸을 보내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고, 왠지 주변에 딸이 '영어를 배우러 필리핀에 갔다'고 말하기도 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지수도 알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개인 사비로 가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학교에서 자매 결연한 학교와 어학 연수 프로그램도 알아봤다. 동기들이 미국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스타에 올린걸 보고 부러운 마음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지원 조건은 토익 800점이라는 허들이 있었다. 영어를 배우러 간다는데, 영어를 잘해야 된다는게 어이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그런 얘기까진 하진 않았다. 그냥 요즘은 필리핀도 많이 간다고 했다. 거기서 영어 배워서 토익 800점 넘긴 블로거 얘기도, 자기 지인처럼 거짓말 좀 보태서 설득했다.
무튼 그렇게 간 필리핀은 생각보다 좋았다. 흰 피부를 가진 예쁘장한 지수를 필리핀 사람들은 좋아했고, 호의적이었다. 그렇다보니, 영어도 더 잘 되는 것 같았다. 길거리에서 서양인이 길을 물었을 때는 뭔가 빨리 대답해줘야할 것 같고,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미안해서 더 움츠러 들었다. 그런데 자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할까' 하고 똘망 똘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필리핀 사람들의 눈을 보면 마음이 편해졌고, 잘 되는 영어가 아니더라도, 또박 또박 말해서 의사를 전달하고 싶어졌다. 6개월 해보고 결정하자던 계획은 1년이 되었고, 지수는 생활 영어는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고, 토익 점수는 760점이 넘었다.
한국에 돌아올 때는 큰 자산을 얻은 것처럼, 당당하게 금의환향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역시 전공이 발목을 잡았다. 영어도 그 점수로 취업에 플러스가 되기엔 애매한 점수였다. 남들도 다 있는 점수를 가진 정도 수준, 즉 단점을 좀 극복한 것이지, 장점이 되진 못했다. 아버지가 대준 돈으로 보낸 필리핀에서의 1년의 효과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도대체가 미대 출신은 다들 어디서 뭘하고 사는지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필리핀 어학 연수를 할 때 사귄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지수에게 어디서 산 옷이냐, 얼마짜리냐, 한국에선 다 이런 걸 입느냐.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게 계기가 되었다. 생각해보니, 자기가 미대를 간 건 어쩌면 패션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 인 것 같기도 하다고, 그제서야 생각했다. 자기가 재봉틀질은 못하지만, 나름 필리핀에서의 경험으로 패셔니스타가 된 자신감도 장착된 상태였다.
그 무렵 수진은 만 1년이 다 되어가는 디자이너였다.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학생답게 여러 세계적인 디지이너들의 작품과 디자인 세계를 잘 알고 있긴 했지만, 실무에서 그런 취향은 전혀 쓸 일이 없었다. 가성비 좋은 소재로, 매스 브랜드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좋아흔 편한 옷을 잘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자기 취향을 넣으려고 하면, 영업 MD들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품평회 때 저런 디테일은 빼고 가격이나 낮춰달라고 했다. 수진의 취향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 중저가 브랜드를 바꿀만큼 대단한 천재성은 아니었다.
지수는 자기를 보러 와준 필리핀 친구들에게 한국을 소개시켜줄 계획을 짜고 있었다. 당연히 동대문은 꼭 가야 하는 장소였고, 기왕이면 이쁘장한 패션디자인 전공 친구와 함께 가서 옷을 추천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수진도 함께 불렀다. 수진은 처음엔 영어도 못하는데 뭘 굳이 가냐고 했지만, 지수가 사귄 친구들이 누군지도 궁금하기도 해서, 따라갔다.
결과는 성공적. 필리핀 친구들은 지수와 수진이 추천하는 옷들을 모두 대 만족했다. 한국 옷들은 필리핀보다는 비싸지만, 다른 나라 옷들보다 정말 가성비가 좋고, 정말 세련되고 패셔너블하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수진파와 지수파가 갈렸다. 어떤 이들은 수진의 추천 옷들을 좋아했고, 어떤 이들은 지수가 추천해주는 옷을 좋아했다.
그렇게 왁자지껄한 쇼핑을 마치고, 지수와 수진은 필리핀 친구들을 보내고, 둘이 오랜만에 술 한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친구들 진짜 재밌지 않냐? 애들이 순수하고 귀여워. 뭐만 말하면 좋다고 엄청 웃고. 샌디는 니가 추천하는 옷에 환장하던데?"
"그러게, 너랑 그 친구들 노는거 보니까 너 필리핀에서 정말 재밌었겠더라. 이제 겨우 1년 됐는데, 계속 어차피 일할꺼면, 왜 그 1년을 못 놀았나 싶어. 야, 그나저나 너는 필리핀에서 옷 장사 해야될 것 같애. 샌디 말고 다른 애들은 다 니가 뭐만 들어주면 환장하던데 뭐."
"걔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좀 아는거지. 1년 있었자나. 근데 내가 무슨 옷을 파냐. 옷 자체를 모르는데. 걔들 취향 좀 안다고 뛰어들 순 없지. 풉. 니가 진지하게 말한 것도 아닌데 나 왜 오바해?"
"지수야,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너 취업 될 때까지 인터넷으로 옷 떼다 팔아보는거 어때? 내가 도와줄게. 나는 브랜드 디자이너인데도, 중저가이기도 하고, 요즘 업체에서 가져오는 단가가 어떤건지 몰라서 동대문 시장 조사도 자주 가거든. 첨에는 그냥 몇십벌만 떼다 팔아도 돼. 너 하얗고 말랐으니까, 니가 입고 찍어서 파는거지."
"야, 취업 될거란 소린 안해주고 할 소리냐? 반 악담이네 완전. 그런게 되면 다 하게?"
"아니 그냥 뭐, 나도 언젠가는 해보고 싶은 일인데, 미친 이 월급이 뭐라고, 매일 하루에 12시간씩 갖다 바치면서, 시작을 못하겠다. 경험이 부족한 것 같다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긴 한데, 그냥 이러다 평생 못할 것 같아."
"그냥 동대문 같은데서 옷들 골라서 내가 입고 착장 올려서 파는거야?"
"어 그런거지. 한국 사람들이 너같이 하얗고 여성 여성한 가녀린 몸매 로망이 있자나."
"미친년, 너 얼굴 디스하는거지?"
"머래. 아무튼 생각 있음 연락해. 재밌을 거 같지 않냐? 어차피 우리 학벌에 회사에서 크게 성공하겠냐. 이런거 잘 풀리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모를 일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나 취했나? 쫌 잘할 것 같애."
꺄르르 웃었다가, 잠시 진지해졌다가, 그렇게 조금씩 취해갔고, 취한만큼 즐거운 밤은 무르 익었다. 지수가 의류 사업에 뛰어든 건 이렇게 사소한 계기로였다. 얼마 후에, 지수는 수진에게 연락했다. 취업이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서가 51%, 진짜 한 번쯤 어떻게 되려나 궁금한 마음이 49%였다. 무엇보다, 어차피 취업이 된다고 해도, 지원하는 회사들이 하나 같이 어차피 오래 다니고 싶지 않은 회사들 뿐이었다.
첫 아이템은 쉽게 입을 수 있는 스웨트 셔츠였다. 연핑크와 연보라색으로 여성스러운 컬러와, 약간 어깨에 볼륨이 들어간 디테일, 소매 부분의 셔링이이 특징이었다. 치마랑 입으면 그럴싸 했다. 수진의 조언대로, 지수가 입으니 세상 여성스러운 연출이 되었다.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 가늘고 긴 팔다리에 입으니, 어차피 뭘 입어도 예뻤을텐데, 그 옷은 유난히 더 예뻤다. 겁없이 미디엄과 라지 사이즈를 각각 20장씩 컬러별로 80장을 샀다. 240만원이라는 큰 돈이 필요했다. 120정도는 그 동안 아껴온 알바비로, 나머지는 수진에게, 팔리면 바로 바로 입금금액부터 먼저 갚는 조건으로 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