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국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내게 요제프 슘페터의 이미지는 왜인지 모르게 '재수없는 존잘 천재' 같은 느낌인데, 아까 점심으로 칼국수를 시켜놓고 기다리다가 문득 슘페터의 이야기가 민주주의에 골때리게 들어맞는다는 것이었다. 먼저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에서 민주주의를 기존의 공공선이니 어쩌니 하는 고전적 가치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존재하는 정치체제" 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최소민주주의 이론은 -정말 재수없어 보이지만- 현대의 (대의)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정확히 짚은 이론이라고 평가받고, 비교정치학의 골자가 되는 이론인데, 이 '선거' 라는 것을 조금 더 포괄적으로, '시민권'의 영역에서 사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분명 어느 정도 확대해석일 가능성이 높지만)
현대의 자유-민주 공화국 에서 시민권을 대표하는 대명사처럼 쓰이는 것이 바로 '선거' 인데, 슘페터의 말대로 민주주의의 가장 큰 조건인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가능하려면 그 자유-민주 공화국은 그 구성원들의 시민권이 정말 잘 구성되어 있고 침해받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이념적이고 사고적인 이상 공동체 모여라 꿈동산이 아니라 일종의 준거로 설정해 어떠한 정치공동체의 민주주의 수준을 판단한다면, 생각보다 여러 방면에서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선거의 4대원칙이 존재하고 하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 다양한 정체성과 지향성을 지니는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표출되고, 대변되고 (재)구성되는가의 측면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 이주민, 성소수자, 노동자, 장애인, 빈민 등 사회적 약자/소수자들의 정치사회적 목소리가 어떻게 구성되고, 대변되고, 어떤 반응을 얻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종의 지표 비슷한 것들은 단순히 선거 수준을 넘어 (시민권의 영역에 들어가는) 사회적 제도나 안전망 같은 것과도 연결되어 그 정치공동체에서 민주주의가 얼만큼 실현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좋은 (일종의) 자료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달까.
예를 들어,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해 보자. 성소수자들은 적어도 명목상이나마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물론 법적 성인이 아닌 이들은 그 안에도 들지 못하지만. 그런데 작게는 이번 대선에서 성소수자들의 시민권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페미니스트 대통령 후보' 의 지지자들은 여성/성소수자/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진 이가 외친 "제 인권을 어떻게 반으로 가를 수 있습니까?" 라는 말에 "나중에" 만 외칠 뿐이었고, 지금은 대통령이 된 그 페미니스트 대통령 후보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이후에도. 그리고 토론회에서는 "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 고, 전국민에게 고백해 버렸다. 그 말은, 그의 국가에서 성소수자는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의 것이었다.
그것 뿐인가, 투표소 밖으로 나가 사회로 나가봐도 성소수자는 시민으로서 대우받지 못한다. 이등 시민도 아니고 그냥 일탈을 저지르는 '하위 문화의 공유자들' 취급을 받는다. 자신이 법적 성별과 다름을 증명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 감정을 소비해야 하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성별이라면 결혼을 생각할 수도 없다. 법적인 보호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리고 폭력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적혀있지 않은 관습법에 의해 그것을 드러내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EBS <까칠남녀> 에서 (스스로 바이섹슈얼임음 커밍아웃 한) 은하선 씨가 강제로 하차하게 된 것도 어느정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선거와 제도, 사회적 관습 등에서 성소수자는 자유와 공정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치르는 선거는 비-성소수자들과 같은 기울기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이는 곧 슘페터의 조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에 부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복합적으로 성소수자에게 이 공화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단 성소수자 뿐 아니라, 여성이나 이주민, 장애인 같은 소수자나 다른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이러한 '자유롭고 공정한' 시민권의 잣대를 가져다 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예로, 이주민 출신의 여성 정치인 이자스민 씨는 그가 어떤 일, 어떤 인터뷰를 하건 인종차별과 여성혐오를 동시에 겪어야만 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의 정체성을 두고 공격을 한 것이다. 그러한 공격과 혐오들은 곧, 이 사회가 이주민에게도 여성에게도 같은 넓이와 기울기의 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온전한 '시민'으로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참 좋은 반증이기도 하다.
정치학에는 '다수의 독재(tyranny of majority)' 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영향력을 지닌 다수가, 그렇지 못한 소수에게 사회적으로 독재를 펼친다는 것이다. 비슷한, 혹은 통일된 규범이나 정체성을 요구하고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일종의 사회적인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느냐." 라는 말이 이 다수의 독재를 정말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도적 프로크루스테스가 자신의 침대와 키가 맞지 않는 사람을 자르거나 늘여서 죽인 것 처럼 자신들이 만들어낸 -해일에 맞서야 하는 - 규범에 들어맞지 않으면 일탈하는 - 조개를 줍고 있는 - 것으로 규정하고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 해일과 조개의 비유는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거대한 문제를 '공동의 최우선 과제' 로 설정하고,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문제들은 필요없거나 미뤄도 되는 사변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해일을 막아야 한다고 하는 프로크루스테스들이 엄격해질수록, 민주주의의 가치인 자유롭고 공정함은 훼손되거나 만족시키기 어렵게 되고, 선거로 대표되는 시민권의 영역은 점점 더 기울어지고 좁아지게 마련이다. 군부독재를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그 안의 여성문제가 사변적인 것이라는 취급을 받고, 이명박근혜 정권을 촛불로서 심판하고 다스(DAS)가 누구 것이냐는 질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 노동 의제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리부트하기 위해 성소수자들은 여성인권 챙기는 데 도움 안 되는 '정신병자'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해일을 잘 막아낸 후에 조개를 줍는 것이 가능해졌을까? 아니, 해일은 어디선가 꾸준히 몰아쳤고, 조개를 줍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조개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바보같은 짓 하지 말고 해일이나 막으라며 소리를 지르는 이들도 있었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다수(majority)는 이런저런 소수(minorities) 들이 시민권을 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로크루스테스가 자신의 침대를 끔찍히 아꼈던 것처럼 말이다, 서프레제트 때도, 차티스트 운동 때도, 마틴 루터 킹 때도 그랬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지닌, 달리 말하면 모두가 기울어지지 않은 땅 위에서 같은 시민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로크루스테스가 다른 사회 구성원들을 자신(들)의 침대에 눕혀 죽이려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언제 올 지 모르는 해일을 불안해하는 것보다 조개들을 주워 수많은 조개껍데기들로 방파제를 쌓는 것이 해일을 막는 데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만들고 그것을 공고화해나가는 것은 그러한 조개껍데기들 위에서 이루어져 왔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조개 껍데기들을 모아 방파제를 지어왔던 이들이 아니었다면, 해일이 오는 것을 '무서워' 할 수나 있었겠는가. 다 해일에 쓸려가 죽었겠지. 그런 의미에서 시민권의 적극적인 보장과 확대는 자유-민주공화국이 이루어지는 데에 필수과제일 것이다. 그래야 모두에게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라는 원칙이 세워지고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1월 18일 새벽에 카페베네에서 썼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