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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두세술 Jun 15. 2018

'아주 없음'이 아닌, '있지 않음'의 상태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양희와 필용의 허무하고 특별할 것 없던 관계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건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그날도 필용이 자기 이야기에 도취해 한창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양희가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했다. 양희는 그 말을 감정의 고저 없이, 천원, 이천원을 쥐여주며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톤으로 했다. 필용은 당황해서 어어, 하고는 웃어버렸다.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건데?"
"어떻게요?"
양희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지."
"그런 걸 뭣하러 생각해요."

-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中 -



  한낮이란, 너무 환하고 환해서 종종 창피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눈물을 흘리기에도, 진심을 털어놓기에도, 감상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도 ‘너무 한낮’은 좋지 않다. 그렇다면 ‘너무 한낮의 연애’는 어떨까. 너무 환해서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 같지만, 진심을 말하기엔 부끄러운 시간. 섣불리 진심을 말했다간 비웃음을 살 것 같은 연애가 떠오른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시골까지 양희를 찾아온 필용에게 양희가 한 말이다. 어쩐지 그녀는 너무 한낮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듯한 유일한 사람으로 보인다. 진실도, 진심도 말하지 않는 필용과 달리, 그녀는 너무 한낮에도, 그 한낮의 맥도날드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 앞에, 누구도 비웃지 않을 수 있는 나무 같은 사람. 그렇기에 그녀는 무대에서의 침묵만으로 타인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 <너무 한낮의 연애>는 너무 한낮이기에 부끄러워 어떠한 진심도 전하지 못한 필용과, 너무 한낮이기에 어떠한 진심도 그저 진실처럼 전한 양희의 연애를 보여주는 제목이라 생각한다.


  유사한 무엇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것. 또,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러한 말은 사라진 피시버거를 말할 때에 처음 등장한다. 비슷한 A´로 바뀐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진 피시버거. 그리고 그와 반대되게 회사 내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비슷한 A´, 시설관리팀으로 인사이동한 필용. 양희를 보러 시골에 내려오는 동안 사라져버린 필용의 전율했던 사랑. 마지막 장면, 양희에게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


  무언가는 유행이 지났고, 무언가는 쓸모없어졌으며, 무언가는 그저 사라져버렸고, 무언가는 지워야했다. 삶에서 사라지고 지워야하는 많은 것들을 소설은 담고 있다. 그것은 사랑, 상처, 박탈, 또는 일상의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라지는 많은 것들이 다른 무언가로 대체되지 않고 그저 그 자체의 속성을 유지한 채 누군가의 기억 혹은 몸속에 남아있음을 필용은 이해한다. 그것은 각자의 이유로 없어졌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사라진 것들을 ‘아주 없음’으로 만들려 노력하지 말라는, 아픔을 안더라도 살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양희의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가끔 떠오를 것이고 가끔은 나도 모르게 나의 삶에 영향을 주겠지만, 사라진 것들의 아픔을 안은 채, 기억을 안은 채 살아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출처 : 다음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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