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 고요한 사건>
어쩌다 눈이 오면 하얗게 지붕을 갈던 낡은 집들과 골목 어귀에 죽어 있던 그 고양이는 더이상 이 세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백수린, <고요한 사건> 中-
소설은 화자의 학창시절 ‘고요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있다. 그 고요한 사건은 누군가에겐 고요했으며 누군가에겐 치열했고, 누군가에겐 후회였으며 누군가에겐 절망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뒤흔드는 치열한 사건이 누군가에겐 그저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양이 아저씨는 마지막 친구이자 가족을 잃었고 삶을 잃었을 것이다. 반면 화자는 아름다운 눈송이에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며 그들에게 사과할 마지막 기회를 보내버린다. 그녀는 고양이들의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갔던, 고양이 아저씨의 마지막 삶을 짓밟았던 '거대한 사건'을 '고요한 사건'으로 넘겼고, 그것은 그녀의 후회의 기억으로 남았다. 다양한 콘텐츠 속 재개발 사업은 주로 첨예한 갈등을 보여주고,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 주로 사회적 약자들의 절망을 직접적으로 아프게 그려내는 데에 집중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고요한 사건>은 재개발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얼마나 고요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독자에게는 그 고요함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죽은 고양이의 안부를 궁금해 하지만, 나가서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그저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끝나는 것도 그런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고요한’은 조용하고, ‘사건’은 시끄럽다. 이 둘은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이 단어의 조합이 마치 화자의 처지 또는 화자의 태도와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이사 간 서울에서 해지와 무호는 화자의 유일한 친구이지만, 공통점이라곤 담배를 핀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지만, 해지와 무호는 삶을 위해, 화자는 투자를 위해 소금고개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화자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 또한 아니다. 화자는 항상 그 어디에도 위치하지 못한 애매한 처지에 놓인다. 서울에 이사 온 후에도,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심지어 유일한 친구인 해지와 무호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애매한 처지의 화자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은 채 애매한 위치를 취하는 ‘고요한 사건’이란 말과도 비슷하다. ‘고요한 사건’은 조금은 애매하고 모순적이지만, 삶에는 완벽함보단 애매함이, 확신보단 고민이 자주 찾아오곤 한다. 그리고 작가는 ‘고요한 사건’이란 제목과 해지를 통해 이런 삶의 모습을 나타낸다.
앞으로의 화자는 문고리를 열고 문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때의 문고리를 열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