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 삼풍백화점>, 삼풍백화점과 세월호
‘자전소설’과 ‘삼풍백화점’이란 두 단어가 한눈에 들어와, 소설을 읽기 전부터 가슴이 아렸다. 내가 태어나던 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세월호가 침몰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당시, 엄마는 뱃속에 나를 품은 채 퇴근길 버스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 세월호가 침몰할 당시, 나는 식당에서 친구들과 TV를 보고 있었다. 전원 구조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와 다행이다. 그럼 그래야지. 요즘 세상에.’라며 안심하던 기억이 난다. 안심하던 내가 또렷이 기억이 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로 사건, 사고, 죽음 등의 단어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2016년 겨울,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 비행기에서 ‘파도가 지나간 자리’라는 영화를 보고 눈물을 멈출 수 없던 기억이 난다. 사실 죽음과 상실이라는 것 외에는 큰 연관성이 없는 영화였지만, 이상하게 세월호 참사가 떠올라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그 후로도 줄곧 단어 하나에, 장면 하나에 세월호 참사가 겹쳐 보이곤 했다. 나와 어떤 개인적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나의 일, 내 주변인의 일이 아닐지라도 우리들은 그 순간 누군가를 잃었다.
2014년의 그때 밥을 먹으며 TV를 보고 안심했던 것이 미안했고, 떠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또는 애초에 그들이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무엇도 하지 못했음이 미안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누군가는 어쩔 수 있었고 어쩔 수 있어야 했다. 때로는 혹 그 누군가에 나도 포함되지 않을까, 나는 무엇도 할 수 없었던 듯 하지만 한편으론 나 또한 어쩔 수 있었어야 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 상실의 사건에 많은 이들이 죄스러운 마음을 가진 이유도 어쩌면 같은 이유일 것이다.
<삼풍백화점>의 화자의 문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과 감정이 느껴졌다. ‘아까 오 층 냉면집 천장 상판이 주저앉았대. 웬일이니, 설마 오늘 여기 무너지는 거 아니야? 오늘은 죽어도 안 돼! 나 새로 산 바지 입고 왔단 말이야. 그녀들이 까르르 웃었다.’는 구절이 그랬다. 그녀는 이 구절에서 어떤 감정도 서술하지 않았지만, 장면을 기억하는 그녀에게서 ‘그 말을 허투루 넘기지 말걸’, ‘나는 왜 그 징조를 무심코 넘겼을까’와 같은 생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과 그로 인한 죄스러운 감정이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경험했을 때 마음은 자꾸 그 일을 되돌리곤 한다. 그때보다 과거로 돌아가서, ‘내가 R과 함께 그 건물에서 함께 나왔더라면’, ‘한동안 소원했던 R에게 먼저 찾아가 웃으며 밥이라도 함께 먹었더라면’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다른 선택으로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고, 적어도 떠난 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줄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고자 하는 마음은 더욱 무거운 아픔을 전하곤 한다.
갑자기 오승근의 트로트 <있을 때 잘해>의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란 유명한 가사가 생각났다. 예전에는 이 가사를 듣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야지’라고 생각하거나, 친구에게 “나 있을 때 나한테 잘해!”라며 장난스럽게 말했었다. 그런데 한편 이미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는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란 말이 얼마나 슬프고 아픈 문장으로 들릴까. 누군가에겐 그 말이 무거운 가시 같은 문장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는 당시 신문에 ‘호화롭기로 소문났던 강남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대한민국이 사치와 향락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칼럼이 실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에겐 가벼운 말이 누군가에겐 무거운 가시가 될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폭력적인 칼럼은 누군가에겐 처참한 분노의 감정을 일으킬 것이다. 상실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의 상실과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공감의 부족으로 타인의 감정과 삶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은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의 진실한 문장으로, 또 다른 상실한 사람들에게 공감의 위로를 전하고 있다. 내가 겪은, 우리 모두가 겪은 상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고, 그로써 그 아픔을 안고 함께 살아나갈 수 있기를. 그러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게 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