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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두세술 Jun 19. 2018

#1 인간의 무기력한 발버둥

나홍진, <곡성>

  나홍진은 <추격자>, <황해>, <곡성>의 영화를 내놓으며 한국 영화계에 자리 잡았다. 그의 영화를 들으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폭력과 죽음.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잔혹한 폭력과 죽음이 등장한다. 특히 <황해>는 156분의 러닝타임 동안 숨 쉴 수 없을 정도의 폭력이 계속된다. 결국 모든 인물이 죽었을 때야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을 정도로 <황해>의 폭력성은 지독했다. <곡성>은 나홍진 영화 중 유일하게 15세 관람가지만, 폭력의 묘사가 줄었을 뿐 감정적으로는 가장 잔혹한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 살인 사건, 심지어 어린 딸에 의한 가족 살인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잔혹한 폭력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저 자극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곡성> 출처 : 다음영화

  감독은 폭력과 죽음, 걷잡을 수 없는 불행 앞에서의 무기력한 인간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곡성>에서 종구의 가족은 원인 모를 불행에 휩싸인다. 어느 날 마을에서 벌어진 가족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딸 효진이 아프기 시작했으며, 마을에는 근거 없는 소문만 떠돌아다닐 뿐이다. 원인도, 해결법도 없는 불행 앞에 종구는 발버둥 치지만 결국 참극을 피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불행의 이유를 묻는 종구에게 일광은 “자네 딸은 그저 미끼를 물어분 것”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이러한 원인 모를 불행은 <추격자>와 <황해>에서도 나타난다. <추격자>에선 연쇄 살인마 지영민에게 이유 없이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이 등장하며, <황해>의 대부분의 인물은 그저 살기 위해 폭력을 행하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특히 청부살인 피해자였던 김승현 교수(곽도원)와 구남은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채’ 불행을 겪게 된다. 다만 <곡성>과 두 영화의 차이점이 있다면 <곡성>에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곡성>의 불행은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어 버렸다. 초자연적 존재 앞에 인간은 더욱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 비극은 더욱 허무하게 느껴진다.     


<곡성> 출처 : 다음영화

  인물들의 이러한 무기력함은 상당 부분 무지에서 발생하고 있다. <곡성>의 경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인사건의 전말을 독버섯에서 찾으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무지를 범한다. 종구 역시 무명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참극을 맞는다. <추격자> 엄중호(김윤석)는 살인마가 인신매매 범죄자라며 죄조차 모른 채 범인을 쫓으며, <황해> 구남은 어떤 상황인지조차 모른 채 살인사건 현장에 들어갔다 누명을 쓴다. 나홍진이 바라본 인간은 불행 앞에 무지하며 무지하기 때문에 무기력하다.     


  그의 영화에는 무기력함이 특히 강조되는 대상이 존재한다. 여성과 어린아이 그리고 제도적 존재들이다. <곡성>에서 일본인의 공격을 받는 존재는 딸 효진으로, 어린 여자아이다. 나홍진은 가장 보호받아야 할 존재, 또는 보호하고 싶은 존재인 어린 여자아이를 고통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또한 효진에게 죽임을 당하는 대상 역시 여성, 효진의 할머니와 엄마이다. <추격자>에서 또한 피해자는 주로 여성들이다. 심지어 미진의 딸은 미진이 나가는 모습부터 그녀의 위험을 느끼고 죽음을 전해 듣기까지,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과 다름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황해> 또한 마찬가지다. <황해>에는 수많은 폭력과 죽음이 등장하지만, 남성들은 주로 폭력을 행하다 또는 폭력에 저항하다 죽음을 맞는다. 그에 반해 살해당한 조선족 여성, 남편의 죽음을 목격한 아내, 연변에 남은 구남의 모친과 딸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불행을 맞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2 나홍진, <곡성>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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