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곡성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또 다른 존재는 제도인데, 나홍진의 영화에는 특히 무능한 경찰이 자주 등장한다. <추격자>의 경찰은 다 잡은 범인을 놓아줄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난 살인을 막지 못한다. <황해>에서 역시 경찰은 수많은 병력에도 눈앞에서 용의자를 놓치고, 용의자 대신 동료에게 총을 쏘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곡성>에는 경찰뿐만 아니라 무능한 의사와 신부가 등장한다. 경찰은 본인 하나 지키지 못할 것처럼 겁이 많은 모습을 보이며, 사건의 전말을 계속해서 버섯에서 찾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의사 역시 환자의 증상에 모르겠다고 답할 뿐이며, 신부는 교회에서 해 줄 일이 없다며 무책임한 말만 뱉을 뿐이다. 우리는 위험할 때 경찰을, 아플 때 의사를,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 종교를 찾는다. 그러나 이들은 “모르겠다.”라고 답할 뿐이다. 감독은 우리가 믿는 제도적 존재들의 무기력함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허구적 이미지를 고발하고 있다.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이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과 보호해야 할 존재들이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손쓸 수 없는 불행으로 더욱 잔혹하게 빠져든다.
종구는 <곡성>에서 가장 필사적으로 불행에 저항하는 존재다. 그는 경찰이자 아버지이지만,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경찰이 아닌 아버지라는 이름이다. 나홍진의 영화에서 인간을 발버둥 치게 만드는 것은 가족애, 특히 부성애다. 나홍진은 인간을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이 사명감 또는 윤리의식이 아닌 사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바라봤을 때 경찰, 의사, 신부가 가지지 못한 것은 능력이나 사명감이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추격자>에서 역시 엄중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돈이었지만 그를 필사적으로 만든 것은 그의 옆을 따라다닌 미진의 딸이었다. 엄마를 잃은 딸의 눈물에 그는 분노하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그는 비록 자식을 두지 않았지만, 미진의 딸을 보며 느꼈을 것은 부모를 잃은 아이에 대한 연민, 나아가 부성애였을 것이다. <황해> 구남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필사적임 뒤에는 연변에 두고 온 그의 딸이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불행 앞에 인간은 무기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발버둥 치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나홍진은 <곡성>이 피해자에 대한 위로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는 “결과는 이러하나 당신은 필사적으로 노력했기에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며 남은 자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쩐지 암울하고 억울하며 허무하기까지 하다. ‘결과는 이러하나 당신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와 ‘당신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결과는 이러했다.’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느껴진다. 감독은 전자를 의도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후자를 느꼈다. 나의 불행은 처음부터 막을 수 없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의 노력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의 노력이 무기력한 발버둥임을 알았을 때 인간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지 않을까. 그의 영화에서 인간의 발버둥이 피워낸 작은 희망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