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 편집을 따라
<케빈에 대하여>의 원작 제목은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원작의 제목이 말하듯,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관객은 케빈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해하는 과정에 놓인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무수한 시간의 교차로 케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편집을 따라 케빈을 따라가면, 관객은 통념을 뒤집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살인마 케빈만을 탓할 수 있는가.’
케빈은 에바의 아들, 원하지 않았던 아들이다. 자유로운 인생을 즐기는 여행가 에바는 계획에 없던 아이, 케빈을 가지게 된다. 에바는 ‘여느 어머니들’이 그렇듯 자신의 아이를 위해 노력하려 하지만, 그녀는 노력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우울과 고통을 겪는다. 설상가상 케빈은 온갖 미운 행동만을 보이는데, 그가 자랄수록 미운 행동은 나쁜 행동으로, 나쁜 행동은 잔혹한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결국 그는 16세의 나이에 아버지와 동생, 마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만다. 그는 마치 짐승을 사냥하듯 화살로 사람들을 살해한다.
앞에서 말했듯, 이 이야기는 무수한 시간의 교차 속에서 진행된다. 살해 사건 후 에바의 일상과, 그 일상 속에서 떠오르는 에바의 회상이 수시로 교차하는 것이다. 영화는 철저히 에바의 시선을 따라 진행되는데, 새빨간 단풍을 본 에바가 살해 현장의 새빨간 철문을 떠올리는 식이다. 이와 같은 교차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계속된다. 집 앞의 농구공 소리가 과거 딸의 인형 소리와 교차되며, 면접을 보러 간 여행사의 풍경이 살해 사건 당일 자신의 여행사 풍경과 교차된다. 또한 비 오는 날 차창 밖의 희미한 불빛이 비 오는 사건 현장의 경찰차 불빛으로 교차되며, 케빈을 뱃속에 품었을 때 지나간 복도와 케빈의 교도소 복도가 교차된다. 이렇게 영화는 특별한 트랜지션 효과를 사용하지 않은 채 비슷한 이미지 혹은 사운드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따라서 회상의 순서는 마구잡이로 뒤섞여있으며, 관객은 뒤섞인 단편의 조각으로 케빈의 과거를 바라보게 된다.
그 작은 단편의 조각들이 모일수록 관객은 케빈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적어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한 한 사람을, 그 삶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이해받지 못할 잔혹한 존재를, 이해해야만 했을 어머니의 시선으로 그린다. 그리고 질문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그것에 대한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에바의 회상을 마구잡이로 뒤섞은 편집은, 생각의 논리와 순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때문에 흐트러트린 조각을 마주한 관객은 영화의 질문을 능동적으로 곱씹게 된다.
영화는 케빈이 음식을 먹는 장면을 대화 사이에 빈번하게 삽입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스토리 전개와는 큰 상관이 없지만, 장면의 분위기와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식사 자리에서 과일을 먹는 장면이 그러하다. 위 장면은 단순히 과일을 먹는 상황이지만, 케빈이 과즙을 튀기며 과일 리치를 먹는 장면은 잔인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그가 동생 실리아의 한쪽 눈을 의도적으로 실명시킨 정황과 눈알 모양의 과일을 먹는 모습이 연결되며, 잔혹성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와 같이 장면의 중간에 음식을 배치함으로써, 케빈의 잔혹성을 이미지화한다.
위 장면은 에바가 케빈과의 대화를 떠올리는 장면이다. 교도소에서 에바를 만난 케빈은 후회도, 반성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에바를 농락한다. 집에 돌아온 에바는 케빈의 이런 잔혹한 모습을 회상하는데, 이때 회상 속 케빈의 반쪽 얼굴에 에바의 반쪽 얼굴이 겹친다. 이 장면 외에도, 영화는 의도적으로 케빈과 에바를 교차시킨다. 자신을 면회 온 에바의 앞에서, 케빈은 아무 말 없이 입속에서 손톱들을 꺼내 책상에 늘어놓는다. 이후 에바는 마트에서 이웃을 만나는데, 이웃은 그녀가 살인자의 어머니란 이유로 그녀의 계란을 모두 깨트린다. 그리고 그 계란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는 에바는, 부스러진 계란 껍질을 입속에서 꺼내 접시에 늘어놓는다. 이 두 장면은 구도와 행동이 일치되며, 두 사람을 겹치게 보여준다. 또 다른 장면으로는, 물에 얼굴을 박고 있는 에바가 물속에서 고개를 흔들자, 그녀의 얼굴이 케빈의 얼굴로 변하는 장면이 있다. 이렇게 영화는 유사한 이미지의 연결로 두 사람을 일치시키거나, 혹은 그보다 직접적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겹치기도 한다. 이로써 영화는 케빈이 저지른 잔혹한 살해가 고스란히 에바의 고통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케빈에 대하여>는 전반적으로 연속 편집 체계를 따른다. 다만 보통의 연속 편집 체계와 조금 다른 점이 있는데, 이는 모자가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대화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보통의 연속편집체계에서 대화 장면은 쇼트-역 쇼트의 구조(인물-인물이 바라보는 대상)를 가진다. 대화 상대가 맞은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 장면에서 그들은 서로를 등진 채, 바라보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는 쇼트-역 쇼트의 구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아니 사용하지 못한 채 제3자의 시선으로 그들의 대화를 바라본다. 심지어 위 장면은 대화 상대가 존재하는 반대 방향에 공간의 여유를 두었는데, 이로 인해 두 인물이 마치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 장면은 연속 편집 체계를 따르는 동시에, 보통과 다른 무언가(대화에서 쇼트-역 쇼트 구조를 사용하지 않는 것)를 이용하여 두 사람의 단절을 나타낸다.
영화의 편집에서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충돌이다. 대표적인 장면으로는 에바가 교도소에 있는 케빈을 면회 가는 장면이다. 에바는 차를 몰고 가는 중 케빈의 사건 당일을 회상한다. 장면에는 울부짖는 피해자 가족의 모습과 함께, 갑작스레 밝은 리듬의 컨트리풍 음악이 등장한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음악은 차를 몰고 가는 에바를 표현하듯 ‘재빨리 차를 몰고 갈 거야’와 같은 가사를 가진다. 이처럼 영화는 장면과 상반되도록 밝은 리듬을 가진, 그러나 동시에 상황과 일치하는 가사를 가진 음악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이와 같이 영화는 결코 기쁘지 않은 장면, 심지어 잔혹한 장면과 함께 경쾌한 리듬의 음악을 배치하여 이미지와 사운드를 충돌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의 편집으로, 관객은 그들의 뒤틀린 사랑과 애증, 혼란을 함께 느끼게 된다.
흐트러진 충돌의 조각들처럼, 영화는 이분법적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현실의 모호함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한 살인마이자 평생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 케빈. 그리고 그런 그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말할 수 없던 엄마 에바. 누가 그 비극을 만들어내었는지, 그 비극의 시작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에바가 케빈을 안아보았듯, 에바는, 그리고 관객은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그 시작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