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회사에서 저희 부서는 나이순으로 부장님, 저, 그리고 여직원 두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여직원 중 한 분은 회사에서 사용하는 비용의 입력과 총괄적인 회계처리 업무를 진행했고, 가장 어린 여직원은 영업매출의 입력과 회계처리 업무 보조를 진행했습니다.
하나의 팀으로 구성된 조직이었지만 저는 다른 세사람과 분야가 다른 업무를 많이 진행했습니다. 업무적 교류가 거의 없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서로 인사도 하고 밥도 같이 먹긴 하지만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친하지도 않는 말그대로 회사에서 옆자리 앉은 그냥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부장님과 여직원 두 명은 관계도 역시 비슷했습니다. 세명 모두 회계파트의 업무를 주로 진행했지만 부장님은 연세가 많으셨고 조용조용했으며 업무진행만 잘 된다면 별 말씀이 없었고, 여직원들은 20대 중반이었으니 업무 외적인 대화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그런 사이였습니다.
어느 날 야근이 끝나고 부장님과 단둘이 술잔을 주고받는 시간이었습니다. 부장님이 평소와는 다르게 머뭇머뭇 하고 부자연스러운 것 같길래 의중을 물어봤고, 부장님은 이런 부탁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뇨 그냥 말씀하지 마세요 부탁 같은 것은 듣지 않겠습니다.' 라고 강력하게 말해야 했지만 상하관계가 분명했던 2000년대 초의 우리나라 중소기업에서, 상사가 부탁이 있다는데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여직원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업무지시가 있어도 처리가 늦고 왠지 자신을 은연중에 무시하는 것 같아서 불만이 많다. 하지만 세대차이도 많이 나는 여직원들 이라서 큰소리로 야단치기가 좀 꺼려진다. 그러니 간혹 별 것 아닌 사항이라도 내가 너를 야단치겠다. 왜냐하면 여직원들은 네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해서 혼날 일이 없다고 생각할 텐데 내가 너를 야단치는 모습을 보면 자기들도 혼날 수 있겠구나 하고 조심하지 않겠냐.’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요? 말이 맞긴 할까요? 저 상황이 혹시 이해가 가시나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해서 관계없는 나를 혼내겠다?
지금이었다면 이게 한글이 맞느냐고 되물으면서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냐고 이야기했겠지만 그 당시 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과정은 지루할 수 있으니 결론적부터 말씀드리자면, 타 부서 분들이나 대표님도 안 그러던 친구가 왜 자꾸 혼나지? 신변에 무슨 일이 있나? 또는 저 부장님이 왜 화내지? 별것도 아닌데 왜 저리 심하게 굴지? 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여직원들은,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친한 사이가 되어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일 잘하고 칭찬받던 사람이 갑자기 혼나기 시작해서 당황은 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원래 별거 아닌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부분 역시 그 부장님이 제 최악의 상사 중 한 명이 되는데 큰 힘을 보탰습니다. 그 당시 부장님의 나이가 지금의 이글을 쓰는 제 나이보다 5년 이상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방법과 예의는 나이가 많다고 반드시 좋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상사의 지시를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업무적 지시가 아닌 경우도 발생할 것이고 업무인지 아닌지 상당히 애모호한 부탁도 발생합니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에 별로 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이 매우 각별한 사이에서나 할 법한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인사평가가 상사의 말한마디에 좌지우지되기 쉬우며, 인원이 많지 않은 관계로 소문이 전사에 확산되기 쉬운 중소기업의 특성상, 부탁을 듣는게 맞는지에 대해 우려가 되더라도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하면서 가급적이면 상사의 부탁의 들어줍니다. 이런 부탁들은 상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서의 동료, 타 부서 인원, 거래처 사람 등 업무적이던 아니던 이런 저런 부탁이 발생하기 마련이죠
개인적인 견해로 말씀드리면 회사에서는 어느정도 선을 그어야 하며 서로 간에 부탁을 주고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정말 마음이 잘 맞고 믿음직스러우며 죽마고우처럼 지낼 수 있는, 내가 가진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직장 동료나 상사라면 뭐 아무 말도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피하시길 당부 드립니다.
커피 한잔 사주세요, 제가 바빠서 그러니 간단한 업무 하나만 대신 처리해주실 수 있나요? 라는 부탁일지라도 공평한 기브 앤 테이크 관계로 종료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부탁을 잘 들어주고 도움을 준다면 아주 매우 높은 확률로 그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하거나 자신의 노력대비 매우 낮은 수준의 보답을 받을 것이며 그 이후로 더 부탁이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정 부탁을 들어 주시겠다면 정말 최소한도의 수준에서 정말 자신에게 아무런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 수준에서만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베풀었다고만 생각하시고 ‘나는 했는데 왜 너는 안해’ 같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일 좋은 것은 상대방의 부탁을 열심히 귀로만 들어주고 정중하게 거절한 후 행동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소기업에서 발생하는 좋지 않은 문제들은 업무와 연관되어 발생할 확률이 매우 희박합니다. 상대방과 업무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사이의 문제는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 발생함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업무 외적인 문제는 서로 주고받는 부탁에서 발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부탁이 가미된다면 부디 냉철하게 판단하고 절대 손해보지 않는 수준에서 현명하게 대처하시길 당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