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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Aug 02. 2019

이덕무의 아홉 가지 독서법

 젊은이가 책을 읽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책만 읽는 바보


 옛사람은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조선시대 때 밤낮 책만 읽는 옆집 총각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이웃 처녀가 담장을 뛰어넘어 사랑을 고백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문책 읽는 소리가 멀리서 들으면 노래처럼 들렸단다. 높고 낮은 장단이 착착 맞았다. 덧붙여 목소리까지 좋으니, 옆집 처녀의 마음이 설레는 것은 당연하다.


 책만 읽는 바보, 일명 간서치 이덕무. 그는 열여덟 살 나이에 아홉 가지 책 읽는 방법을 정리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 나이다. 이때부터 이미 책에 파묻혀 살았다. 그는 <간서치 전>에서 본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어려서부터 스물한 살 때까지 하루도 고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그 방은 몹시 작다. 하지만 동쪽, 남쪽, 서쪽에 창문이 나 있다. 해가 동쪽에 있으면 동창 아래서 읽고, 서쪽으로 기울면 서창 아래서 빛을 받아 책을 읽었다. 한 번도 못 본 책을 보면 너무 기뻐 웃었다. 집안 식구들이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어디서 또 기이한 책을 구해온 줄 알았다."



나는 왜 기뻐하며 웃지 않는가...


 여름휴가 때 읽을 책들을 잔뜩 사뒀다. 도착한 새 책을 마주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 조금 욕심부렸을까. 이덕무처럼 기쁘게 웃지 못했다. 스스로 책을 향한 열정과 태도를 다시 한번 고쳐봐야겠다. 진심으로 책을 사랑한 그가 정리한 아홉 가지 독서법을 소개한다.



첫째는 독서다. 

독서는 입으로 소리 내서 가락을 맞춰 읽는 것이다. 예전에는 책은 반드시 소리 내서 읽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동서양이 한 가지로 다 그랬다.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아랫배에 힘을 주고서 목청을 돋워 낭랑하게 읽었다. 서당은 종일 책 읽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서당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한여름 밤 연못가 개구리울음 소리 같다고 한 시인도 있었다. 옛사람들은 소리를 크게 내서 읽어야 글 속의 기운이 내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고 믿었다. 소리와 함께 옛 성현의 생각과 기상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고 여겼다. 이른바 인성구기(因聲求氣), 즉 소리로 인해 기운을 구하는 독서법이었다.


소리 내어 읽으면 좋은 점이 참 많다. 좋은 글에는 무엇보다 리듬이 살아 있다. 훌륭한 책은 내용도 좋지만 무엇보다 글의 가락이 자연스럽다. 글의 결은 소리를 내서 읽어야 비로소 느껴진다. 좋은 글을 여러 번 소리 내서 읽으면 말의 가락이 살아나서 울림이 더 깊어진다. 오늘날은 낭독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소리 내서 읽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두 번째는 간서다. 

눈으로 읽는 것이다. 앞서 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자신의 화상에 붙인 찬에서, "창 밝고 고요한데, 주림 참고 책을 본다"라고 한 글에 보인다. 사방은 고요하고 방안엔 달빛이 비친다. 배에서 문득 꼬르륵 소리가 난다. 하지만 나는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글을 읽는다. 이 송시열 선생이 쓰시던 앉은뱅이책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큰 통나무를 네모지에 잘라, 가운데 부분을 V자 모양으로 팠다. 책을 얹어놓아도 엎어지지 않는 독서대를 겸했다. 이런 소박한 책상 앞에서 배고픔을 참고서 책을 읽었다. 배고플 때 책을 읽으면 책 읽는 소리가 더 낭랑하다. 하지만 깊은 밤중에 생각에 골똘히 잠겨 읽을 대는 소리는 멎고 눈으로만 읽었다.


세 번째는 초서다.

초라는 한자는 베낀다는 뜻이다. 책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을 베껴가며 손으로 읽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가장 역점을 두고 강조했던 독서법이다. 초서의 방법을 제대로만 익힌다면 열흘에 100권의 책도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다고 말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다산초당의 제자들은 저마다 독서노트를 가지고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왜 읽는지 목표를 정하고, 어떤 내용을 간추릴지 미리 생각한 후 공책을 펴놓고 붓을 든 채 책을 읽었다. 이렇게 손으로 베껴 쓰면서 읽으면 읽고 나서도 내용이 오래 기억되고 생각이 명료하게 정리되어 독서의 효과가 대단히 높았다.


네 번째는 교서를 꼽았다.

교서는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아 교정해가며 읽는 것이다. 읽다가 궁금하거나 의문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관련 자료를 뒤져서 내용을 확인한다. 잘못된 부분이 나오면 이를 바로잡고 여백에 메모를 남긴다. 추사 연구자였던 후지쓰가 지카시가 소장했던 책에는 원문의 오류를 붉은색 먹글씨로 바로잡아둔 교서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그는 새로 책을 구하면 교서부터 시작했다. 제자가 귀한 책을 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먼저 가져오게 해 교서 작업을 해서 빨간 먹글씨로 고쳐주곤 했다. 스승의 교서 흔적이 있는 책을 지닌 것을 제자들은 큰 자랑으로 알았다. 이런 교서 작업을 통해 책을 허투루 읽지 않고 꼼꼼히 읽는 학문의 기본기를 닦았다. 특히 출판물보다 필사본에 의존했던 조선시대의 서책들은 베껴 쓰는 과정에서 잘못 쓰거나 빠뜨리는 실수가 잦았으므로 책 읽기에는 교서의 과정이 중시되었다. 조선시대 경적의 인쇄를 담당하던 관청 이름도 교서관이었다. 책을 출판하려면 교서 과정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평서다.

평서는 교서보다 좀 더 적극적인 독서 활동이다. 평서는 책을 읽고 나서 책의 인상적인 부분이나 책 전체에 대한 감상과 평을 남기는 일이다. 책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진다. 사람의 기억은 잠깐 만에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까 책을 읽고 나서는 읽고 난 소감을 적어둘 필요가 있다. 훗날 예전에 쓴 독후감을 보면 당시의 내 생각을 알 수 있고, 지금의 생각과 견줘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한번 익힌 것을 기억의 저장고 속에 잘 간직해두려면 이 평서 활동이 중요하다. 평서도 책 위쪽에 쓴 것은 미평이라 하고 끝에 쓴 것은 미평이라고 했다. 이덕무는 박지원의 [종북소선]이란 선집을 자신의 친필로 베낀 후 책 상단과 좌우 여백에 붉은 먹으로 평을 단 책을 남겼다. 여기 적힌 평들은 그 자체로 한 편 한 편의 훌륭한 작품이다. 이덕무가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대의 장서를 내게 교서 하고 평서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쁘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라고 쓴 내용이 보인다.


여섯 번째는 저서다.

독서가 깊어지면 남의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제 생각을 펼쳐 보이고 싶어 진다. 비로소 붓을 들어 먹물에 적신 후 흰 종이 위에 자기의 생각을 적어나간다. 이제껏 책 읽기와 관련된 여러 활동은 사실 이 순간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사람은 제 말하자고 사는 존재다. 제 목소리 없이 평생 남의 말만 따라 하는 것은 앵무새다. 사람만 제 말을 할 줄 안다. 저서는 글쓰기다. 이제까지는 남의 글을 읽기만 했는데 많이 읽고 자꾸 생각하다 보니 나도 할 말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펼쳐서 독자들이 공감하면 그것이 곧 저서다. 내가 저자가 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장서를 들었다.

장서는 책을 보관한다는 뜻이다. 책을 잘 간수해서 찾기 쉽게 배열하고, 낡아서 해진 책은 새로 묶고 표지를 바꾼다. 어떤 사람은 책을 구하면 장서인부터 먼저 찍었다. 붉은 안주로 책의 첫 면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을 꽉 찍는 순간 그 책은 비로소 자신의 소유물이 되었다. 장서의 규칙 같은 것을 세세히 적어둔 옛글도 적지가 않다. 어떤 장서가는 자신의 장서 목록을 별도의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심한 경우 각각의 책이 꽂힌 위치까지 적어두었다.


여덟 번째는 차서다.

차서는 남에게 책을 빌리는 것이다. 책값은 그때나 지금이나 꽤 비싸서 읽고 싶은 책이 많아도 모두 손에 넣을 수가 없다. 이덕무는 집이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책 살 돈이 늘 귀했다. 누가 귀한 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만 들으면 그에게 찾아가 책을 빌려왔다. 주인이 책을 빌려주지 않으면 빌려줄 때까지 사정했다. 어떤 때는 아예 책을 한 권 더 베껴 써주는 조건으로 빌려오기도 했다. 이럴 때는 자신의 몫까지 남기려면 두 벌을 베껴 써야만 했다. 빌려온 책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 반납했다. 이렇게 신용이 쌓여 이덕무가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빌려주었다. 나중에는 이덕무의 눈을 거치지 않았다면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다며 새로 구한 책을 보라고 보내오는 경우마저 있었다.


아홉 번째는 포서다.

도서는 책을 햇볕에 쬐어 말리는 일을 말한다. 봄가을로 햇볕이 짱짱한 날에 옛사람들은 서재 속에서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책들을 마당에 일제히 널어놓고 시원한 바람에 먼지를 털고 책을 말렸다. 한지는 질기고 오래가지만 방안이 환기가 잘되지 않아서 습기를 잔뜩 머금으면 곰팡이가 피고 좀벌레가 생긴다. 좀벌레는 책을 집 삼아 숨어 살면서 책을 갉아먹고 산다. 옛날 책에는 좀벌레가 갉아먹어 책 속에 복잡한 길이 난 것들이 많다. 이런 책벌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환한 햇볕이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햇살이 내리쬘 때 마당 가득 흰 종이책을 널어놓으면 햇살에 놀란 책벌레들이 한꺼번에 나와 달아난다. 축축하고 눅눅하던 책이 바짝 말라서 챙챙거리며 되살아나는 느낌도 새롭다.



마지막으로 <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에서 전하는 이덕무의 책 읽으면 좋은 점 네 가지'에 대한 글로 마무리한다.


 “최근 들어 깨닫게 된 일이 있다. 일과日課를 정해 두고 책을 읽으면 네 가지 유익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박식하고 정밀하게 된다거나 고금古今에 통달하게 된다거나 뜻을 지키고 재주를 키우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유익함이란 무엇인가?


 약간 배가 고플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 글에 담긴 이치를 맛보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게 되니 이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조금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기운이 그 소리를 따라 몸속에 스며들면서 온몸이 활짝 펴져 추위를 잊게 되니 이 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근심과 번뇌가 있을 때 책을 읽으면 내 눈은 글자에 빠져 들고 내 마음은 이치에 잠기게 되어 천만 가지 온갖 상념이 일시에 사라지니 이것이 세 번째 유익함이요, 기침 앓이를 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통창해져 막히는 바가 없게 되어 기침 소리가 돌연 멎게 되니 이것이 네 번째 유익함이다.


 만약 춥거나 덥지도 않고 배고프거나 배부르지도 않으며, 마음은 더없이 화평하고 몸은 더없이 편안한 데다, 등불은 환하고 서책은 가지런하며 책상은 깨끗이 닦여 있다면,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하물며 고원의 뜻과 빼어난 재주를 겸비한 건장한 젊은이가 책을 읽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동지同志들이여, 분발하고 분발할지어다!" (p.178~p.179)



참고 자료 : <책벌레와 독서광> <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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