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모른다.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청년이 있었다. 서울역 뒤편에서 냉면집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도운 날이면 손에 쥔 동전을 갖고 동대문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좋아하는 책을 잔뜩 사서 타고 온 자전거에 실었다. 대부분 일어로 번역된 외국 소설이나 에세이였다. 고등학교 입학 후, 문학동인회를 만들었다.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다. 문학이라는 분야에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날로 강해졌다. 평생의 취미를 본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문학지 신인 작품 모집에 응모했다. 1차 예심을 합격하고 2차 심사만 남겨둔 어느 날이었다. 6.25 전쟁이 터졌다. 그날부터 원치 않은 방향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책에 빠질 수 있었던 시절은 가고, 사회적 흐름에 따라야만 했다. 먹고살기 위해 신문기자가 되어 30년간 일했다. 은퇴 후 다시금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자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잘못 선 보증으로 전재산을 날렸다. 겨우 남의 집 묘막살이를 하며 시제를 지내주면서 입에 풀칠을 한 세월도 있었다.
그는 말한다. 생의 가장 절박한 그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찾아온 기회였다고. 가장 좋아하는 일, 잘하는 것과 꿈을 다시 꺼내어 생계를 꾸리는 계기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읽어온 명저 중에 아직 안 나온 책들, 저작권이 풀린 좋은 책을 발굴해 출판사에 제안했다. 그렇게 15년 동안 200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한마디로 기적이다. 내 인생에 찾아와 준 기적은 내가 나의 운명을 되돌아봤기에 가능했다. 그림자처럼 나를 포기하지 않고 뒤따라와준 운명 덕분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나는 더 이상 그냥 노인이 아니다. 신노인이다. 세상에 없던 노인이다." <취미로 직업을 삼다>의 저자이자 번역가 김욱 선생님 이야기다. 그는 1930년생, 아흔 살이다.
차분히 그의 삶을 읽었다. 밑줄을 그었고 중요한 곳은 접었다. 빈 여백에 내 생각과 감정을 기록했다.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은,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전하는 따뜻한 메시지였다.
인생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선택의 갈림길이 왜 생기는 걸까. 왜 한 길로 가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걸까. 그 일을 했다가는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길을, 직업을, 생활을 선택한다. 일정 기간의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만을 고민하는 존재였다면 이렇듯 방황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방황한다. 그 길은 분명히 위험하다. 그런데 가고 싶다. 정말 가고 싶은 길이다. 그렇다면 가는 수밖에 없다.
실패담을 한 권의 책으로 낸 까닭도 기록되어 있다. 더 고되게 살아가는 분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 그리고 아직 현직에 있는 많은 분들에게 자신처럼 가족 고생시켜가며 늘그막에 비루해지지 말 것을 당부하는 심정으로 쓴 것이었다.
2000년 2월 28일. 날짜도 잊지 못한다. 용달 트럭 하나를 빌려 전날 밤 미리 싸둔 짐을 실었다. 아내가 그토록 아끼던 미제 웨스팅하우스 냉장고를 고물상에 넘기면서 돈 대신 짐 몇 개만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차 두 대로 내 손으로 지어 올린 집을 떠나 묘막으로 향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그날이 이제는 나를 벗어나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시 이런 날이 올 줄은.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백세가 넘는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그의 결의를 보며 마음이 뜨거워졌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계속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 배우고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근사한 어르신의 실패담. 여운이 길다.
취미로 직업을 삼아 일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치열하고 고되지만 내 삶은 생기로 가득하다. 힘들어도 재밌고 신나고 보람 있다. 어릴 적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좋아했다. 달 대신 6펜스를 좇기 쉬운 우리들이지만, 언젠가는 자기만의 달과 만나기를 바란다. 다만 나보다 빠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