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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Oct 12. 2019

좋은 질문이 깨어있는 시민을 만든다

노엄 촘스키 "우리는 영웅을 찾기보다 좋은 생각을 찾아야 한다"


내가 꿈꿨던 기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헌책방에서 처음 마주했던 책 <기자로 산다는 것>은 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가장 좋은 글은 팩트(사실)로 점철된 기사라는 것. 기자가 고생해야 독자가 행복하다는 신념을 나침반 삼아, 밤을 새워 가며 기사를 쓰는 그들의 삶을  동경했다. 내가 꿈꿨던 삶이었다.


정치, 자본 등 어떠한 권력 앞에서도 고고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공명정대하게 정도를 가고자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기자들이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시사저널의 전통이자 정신의 혼이다.

_<기자로 산다는 것>


2011년 12월 어느 날, 두근거렸던 첫 취재 과정은 잊을 수 없다. 당시 어떤 기사를 쓸까 하고 며칠 밤을 지새우던 나는 <노인 복지 정책과 일자리>를 주제로 정했다. 얼마 뒤, 취재원을 확보했다. 여러 분들이 있었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분은 70세가 훌쩍 넘은 할머니였다.


유흥가가 즐비한 건물 들 중 하나가 할머니의 일터였다. 매일 새벽 5시면 업무가 시작됐다. 1층부터 6층까지 화장실과 바닥을 청소했다. 그때 당시 올해로 12년째라며 수줍게 말하시던 모습도 선명하다. 취재하러 왔지만 일손을 도왔다. 덕분에 가만히 서서 질문만 했으면 듣지 못했을, 고단한 그분의 삶을 듣게 되었다.


나흘간 출퇴근을 함께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 첫 취재는 기사화될 수 없었다. "인간극장 대본 쓰냐?"는 핀잔을 받았다. 화가 치밀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스펙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얻은 경험들이 삶을 이루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발견했으니까. 고생했지만 꼭 필요한 수업이자 과정이라 여겼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기사 쓸 수 있는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 희망과 달리 결과는 계속 낙방이었지만, 행복했다.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긴 시간이 흘렀다. 그간 내 꿈은 조금 변했다. 글을 쓰고,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없다. 다만 직업으로써의 기자는 거리를 뒀다. 사실이 분명하고 좋은 글이라면 사회에 충분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지금의 생태계가 한몫한 점도 크다.


가장 큰 이유는 진실을 말해야 되는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언론의 현주소를 거듭 마주했기 때문이다. 비판 정신은 실종되고 '속보'라는 단어를 붙여 속도에만 방점을 찍고 있다. 기사에 노출된 독자는 혼란스러울 뿐이다. 노엄 촘스키는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다음 내용을 썼다.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 노엄 촘스키는 말한다. "양식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


속보는 우리에게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선전 효과에 100퍼센트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동시성과 즉각성은 사건의 흐름에 우리 몸을 그대로 내맡기게 만듭니다.


내 생각에, 현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깊이의 상실입니다.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기억을 지워 없애려고 고안된 것입니다.

_노엄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내가 배운 기자 정신은 물음표다. 묻는 사람이다. 이왕이면 좋은 질문을 던지는 역할이다. 하지만 정작 물어야 될 사람은, 제공하는 왜곡된 정보를 열심히 받아쓰는 학생이 되고 있다. 오히려 기자가 아닌 사람이 팩트를 찾고 유통한다. 물론 고생해서 발로 뛰는 기자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보도되는 양에서 상대적으로 밀린다. 뉴스에 노출되는 독자가 여느 때보다 중요한 것은 이 지점에 있다.


의심해봐야 한다. 어떤 것도 확실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확인하고 심사숙고해야 된다. 자기만의 생각과 시선이 필요하다. 촘스키는 말했다. "사회가 민주화될 때, 달리 말해서 국민을 강제로 통제하고 소외시키기 힘들 때 엘리트 집단은 선전이란 방법을 동원한다."




마지막으로 예전에 썼던 짧은 글을 다시 써본다. 그 맹세를 잊지 않기 위해서. 세월호 사건 후,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제 눈물을 멈추겠습니다. 더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겠습니다.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자책과 반성, 순간의 감정만으로는 그들을 오래 기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긴 호흡과 함께 그들을 가슴에 깊이 새겨놓습니다. 굳게 뜻을 정합니다. 남은 세상, 제가 서 있는 그곳에서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참고 자료 : <기자로 산다는 것>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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