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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Nov 18. 2019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일요일 저녁이었다. 오랜만에 저녁 7시 전 집으로 귀가했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때때로 집이 낯설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간단히 옷을 갈아입고 밀린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그나마 몇 주전 어머니가 방문해서 어느 정도 청소를 해둔 덕분이었는지 긴 시간이 소요되진 않았다.


서재 쪽을 살펴보니 지난번 프러포즈 때 건네준 장미꽃 150송이가 보였다. 문득 유리병에 담아둬야겠다는 생각했다. 주변 마트를 들려 4,500원짜리 유리병 하나를 샀다. 꽃다발을 정리해 가지런히 놓았다. 제법 그럴듯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루를 마감하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펼쳤다. 그리고 빈 A4 용지에 몽당연필로 생각나는 이것저것을 끄적였다. 유독 자주 듣고 있는 '행복'이라는 단어.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지루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소설책을 펼쳤다. 이기호 작가의 소설은 참 재밌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단편 소설집에 묶여있는 <원주 통신>은 읽을 때마다 배가 아플 정도로 키득거린다. 한참 웃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눈을 떠 보니, 새벽 한 시. 또 하루를 넘기고야 말았구나. 피곤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순간. 하나 찔리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아, 오늘은 너무 바빴고 쓸 글감도 없는데'하면서 중얼거린 거렸다. 내가 읽은 책 제목처럼 뭘 쓸까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잠들었다. 의지가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처럼 이렇게 무엇이라도 쓰면 될 것을. 매일 새롭게 마주하는 빈 페이지는, 가끔 나를 유약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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